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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요제프 크네히트

feat. 니체와 헤세

by 고휘연

위버멘쉬(Übermensch)는 인내하는 자가 아니라 춤추는 자이므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 일지도 모른다. 인생이 변화 속에 놓여있어서 의미를 특정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부터 삶의 고양감을 상실하고 곧 춤추는 능력마저 상실할 것이기에.

삶에 대한 질문은 피할 수 없지만 그런 질문을 하면서부터 오히려 삶은 더욱더 미궁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삶의 부조리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도대체가 왜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다. 카뮈처럼 왜 자살하지 않는지 묻는 게 아니다. 삶이란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한 작가들 만이 ‘왜’를 묻지 않는다. 또한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다. "어떻게 ‘살 수 있는가’”다. 헤세의 부조리는 바로 삶에 대한 이러한 통찰 위에서 인식된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와 인간의 삶을 문학으로 조명한다. 한 편 그의 작품 세계에선 주인공의 영적인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 반복되고 또 변주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인물들은 니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유리알 유희의 요제프 크네히트야말로 위버멘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위대한 작품인 유리알 유희는 한편으론 헤겔철학의 판타지라 여길만 하다. 유리알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는 분명히 헤겔철학에 심취해 있다.

반면 헤세는 유희의 근간이 되는 상형문자를 중국의 한문과 비슷하게 묘사한다. 한문은 역사성을 가지는데 의미가 사람들을 통해 형성되고 전승되며 의미가 다시 새롭게 형성되고 또 전승되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의 정반합의 논리와 완벽하게 닮아있다. 정반합은 그 스스로가 반복되면서 완성으로 나아가지만 결국 그 완성은 불가능한데, 헤겔이 보기에 인간은 최종적으로 문화적 존재이지만 문화의 변화는 필연적인 사건이므로 진정한 합은 영원히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헤세는 이러한 과정, 곧 역사 운동을 바로 유리알 유희의 바탕으로 삼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심층에는 니체의 혼돈이 자리하고 있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유리알 유희 명인으로서의 소명도 친구 아들의 스승으로서의 소명도 완수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희는 살아남아서 그 뿌리는 더욱 깊고 단단해졌으며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를 기리는 역사도 이루어졌다. 바로 작품 유리알 유희가 그들에게서 역사로 쓰여진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유희의 반대편인 속세의 제자도 스승의 죽음으로 본인에게 주어진 소명을 깨달으며 그가 곧 완성으로 나아가는 인간이 될 것이었다. 혹자는 이로 인해 요제프의 소명은 완수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요제프 자신을 따랐으며 자신을 구제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유희 명인직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주인공은 헤겔철학의 상징인 유리알 유희와는 대조된다. 요제프는 상징에 속하지 않는다. 역사 운동은 완성으로 나아가지만 결코 완성에 이를 수 없음이 문화가 아니라 바로 요제프 본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제프의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을 보건대 세계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창조적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헤겔의 절대정신은 사라지고 니체의 위버멘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니체의 위버멘쉬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는 고귀한 자가 느끼는 정열이다. 여기에는 우월감이 해당될 수 있다. 니체는 이를 고귀한 자의 전유물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차라투스라>를 중심으로 볼 때 진정 고귀한 자는 거리의 파토스로부터도 자유로운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한 자는 그 무엇을 목표로 삼는다기 보다 그것을 놀이로 여긴다. 니체에게 우월감은 결코 목표가 아니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목표가 아니다. 다만 진정한 놀이를 하는 자, 춤추는 자 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고귀한 자에게는 오직 순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가 아무렴 상관없기에 추구되는 쾌락적 순간이 아니라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바랄 만큼 기뻐 넘쳐흐르는 자의 순간, 바로 이 것이 니체의 영원회귀이며 위버멘쉬는 그러한 순간에 거처하는 자인 것이다.

요제프는 소명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어떤 계산도 당위적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의미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주어진 소명을 완수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뿐이었다. 매 순간 의욕하지 않고 성취했으며 소명의 길로 나아간 요제프 크네히트. 그렇게 순간을 영원으로 주조했던 그가 바로 위버멘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s. 위버멘쉬는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다. <Wille zur Macht>가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인 이유는 첫째로 순간의 영원회귀에는 권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은 개념적으로 정치적이며 타자의 존재가 불가피하므로 시공간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는 순간의 영원회귀에 위배된다. 둘째로 힘은 창조의 원천으로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니체에게서 창조는 오직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라야 가능한데, 이는 인과법칙에 속하지 않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순간의 영원회귀라야 가능한 일이므로 권력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를 단지 번역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다. 니체의 저작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해 볼 때 그는 <Macht>의 자체적 의미가 권력이 아닌 힘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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