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꼴카타에 도착해 게스트하우스에 막 짐을 풀던 밤이었다. 이스탄불에서 도착해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렷했다. 짐을 챙기다 배낭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낡은 철재 침대의 '삐그덕' 소리만이 한밤중의 고요함을 깨트리고 있다.
누군가가 그리운 것도 아닌 그저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침대에 누워 찬찬히 방을 들여다봤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차가운 시멘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벽, 어두침침해 금방이라도 생명이 다할 것 같은 형광등까지 우울함을 더하지 않은 게 없었다.
잠이라도 자면 좋으련만, 잠도 오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순간들까지 계속 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만 생각하자. 난 지금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잠깐 잠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벌써 정오가 넘은 시간이었다.
창문이 없어 여전히 한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문을 여니 꼴카타의 눈부신 햇살이 방안 깊숙히 들어왔다.
유독 따스한 햇살이다.
난 지금 파라곤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다.
꼴커타의 여행자거리인 서더스트리트에서 수십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이다.
이곳은 굉장히 오래됐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아닌 그냥 '낡았다'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곳이다.
수십년간 리모델링을 한번도 안한 것 같은 외관에 화장실과 샤워실도 몇개 없어 줄서있기 일쑤다.
그러나 늘 여행자들로 넘쳐나는 이상한 곳이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이곳은 캘커타에서 가장 낭만적인 숙소였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아담한 마당이 있는데 매일 저녁이 되면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마당으로 모여든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때론 즉석 공연도 열린다.
인도에는 특히 장기여행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악기를 들고 다니는 여행자들이 있다.
운좋게 그들이 모이면 즉석에서 공연을 하는데, 끈적끈적한 밤 공기에 퍼지는 노래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려온다.
스페인 여행자 두명을 만났다. 그들은 여느 여행자와는 다르다. 한명이 선천적 소아마비라 휠체어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20년지기 친구라는 그들은 몇달째 인도를 여행 중이었다. 느긋하게 쉬는게 목적이라 그런지 이곳에서도 대부분 숙소에서 지내곤 했다.
며칠 함께 지내며 친해졌을 무렵 하루는 휠체어 친구에게 물어봤다. 처음 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여행이 힘들지 않았니?"
인도는 특히 여행하기 힘든데, 휠체어까지 타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불편해보이니? 난 전혀 불편한게 없는데. 이게 그냥 나의 모습이잖아"
우문현답이다. 불편함은 그 친구가 느낀 게 아니라, 나의 편협된 시야에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다. 상대방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그들은 이미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여행은 이렇게 곳곳에 스승을 만나게 해준다.
꼴카타의 매력에 빠져있을 때쯤 마더테레사 하우스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자원봉사는 내가 꼴카타에 온 목적이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꼴카타로 몰려든다.
꼴까타는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빈민층을 위해 평생 봉사한 곳으로, 이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유명인은 물론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테레사는 1946년 인도 다즐링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신의 부름에 부응하기 위해 그녀는 바로 거리로 나가지만, 엄숙한 가톨릭 교단은 이를 강력 반대하게 된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1948년 교단의 허락을 받게 된다.
테레사 수녀는 가장 밑바닥에서 어려운 이들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전 세계가 감동했다.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결성되었고 유명인사들도 앞다투어 방문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기부금은 물론 1979년 노벨 평화상 상금도 모두 캘커타의 빈민들을 위해 사용했다.
캘커타는 인도에서 유일하게 인력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인력거는 온전히 사람의 발로만 이동하는 교통수단인데, 깡마른 체구로 인력거를 몰고 뛰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특히 발목까지 차오는 물속을 맨발로 헤치고 가는 캘커타의 여름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하루종일 뛰어 다녀도 고작 몇천원의 수입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인력거외에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다.
나도 그들의 생계를 위해 한번 인력거를 탔는데 올때는 결국 탈 수가 없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맨발로 차도를 뛰어가는 인력거꾼의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력거는 꼴까타 빈민의 상징이다. 영화 <시티오브조이>는 꼴까타를 기쁨의 도시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가슴 아픈 반어법이다.
수많은 이들이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나마 인력거라도 몬다면 운이 좋은 편이고 거리에서 동냥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다. 꼴까타 거리를 조금만 걸어가도 엄마와 아이가, 때론 아이가 아이를 안고 여행자에게 동냥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
테레사 수녀는 이 당연한 권리마저도 누리지 못한 당시 인도의 빈민들을 보며 비통해했다.
자원 봉사를 하려면 먼저 마더테레사 하우스에서 신청을 해야 한다. 봉사 기간 이나 활동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을 위한 호스피스 봉사가 가장 인기가 높은데, 난 남편 폭력에 도망쳐온 여성들의 쉼터를 선택했다.
아침 7시 마더테레사 하우스에 도착해 쉼터까지는 본인이 알아서 가야한다.
버스로 30여분 걸려 도착한 쉼터는 지적 장애인 여성 수십명이 있었다.
남녀차별은 인도에서 카스트제도보다 더 깨기 힘들다. 지금도 수많은 여성들이 폭행을 당하지만, 가해자가 처벌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들에 대한 학대는 더 심한 것이 현실이다.
그녀들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할까, 무거운 마음으로 쉼터에 들어갔는데 환한 미소의 여성들이 날 반갑게 맞이한다. 매일 오는 봉사자들이 귀찮기도 할텐데 그들은 악수를 먼저 건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그들의 아름다운 미소가 한동안 나를 먹먹하게 만든다.
사실 쉼터에서 내가 할일은 별로 없었다. 워낙 손이 빠른 그녀들은 서툰 내 솜씨에 그저 까르르 웃어댄다. 그래도 쉼터의 잡다한 일을 하고 나면 오후에는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들은 매일 아침 나를 반갑게 맞아줬고 헤어질때는 손을 꼭 잡고 조심히 가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마지막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돌아서는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난 그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진정으로 도움 받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 이라는 걸.
나의 메마르고 황량했던 마음은 그들의 따뜻한 미소로 온기를 찾은 것이다.
살아오며 수많은 상처를 받아왔고, 그 상처는 마음 깊숙히 단단한 화석이 되어 있었다.
'난 상처받은 피해자일 뿐'이라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껍데기에 스스로 화석이 된것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다독여 줄때 상처는 치유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쉼터 여성들에게서, 그리고 두명의 여행자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