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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서다

감숙성 가욕관, 그리고 이관(二關)

by 봄날의여행

퀴즈 하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국(한족)이 북방 이민족들을 막기 위해 건설한 6,350k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성벽이다. 허베이성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동쪽 끝이다. 그럼 만리장성의 서쪽 끝은 어디일까?

일쏭달쏭하다.


사실 나 또한 어딘지 몰랐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해가 뜨면 지듯.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인데, 왜 그동안 만리장성의 서쪽 끝은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정답을 얘기하면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峪關)이다.

그리고 정답이 또 있다. 돈황(敦煌)에 있는 옥문관(玉门關), 양관(阳關)이다. 가욕관에서 300km 가량 더 서쪽에 있다.

서쪽 끝이 여러개라니 좀 이상하지만, 가욕관은 명나라 때, 옥문관과 양관은 한나라 때 서쪽 끝의 역할을 했다.




'서쪽 끝'이 주는 의미는 명확하다. 이곳에서부터 진짜 서역(西域)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이곳을 지나면 7천미터가 넘는 천산(天山)산맥과 파미르 고원이 나타난다. 파미르고원 중심에는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죽음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서역은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만 허락된 길이었다.

이 관문을 지날때면 누구나 깊은 한숨을 쉬게 된다.

시안(장안)을 출발한 이들은 그나마(?) 평탄한 하서주랑(란저우에서 돈황까지 이르는 약900km가량의 길)을 지나 본격적인 고역이 시작된다는 두려움에, 서역에서 출발한 이들은 비로소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모두 숨을 깊게 내쉰다.


서쪽 끝이 주는 또 다른 의미는 중국과 이민족의 경계다.

중국 한족에게 이민족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천하의 진시황도 그랬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뒤 가장 먼저 장성 구축에 매진했다. 사실 만리장성의 처음 설계자는 진시황이 아니다. 강한 자만 살아남던 전국시대에 많은 나라들이 쌓았던 성을 진시황이 하나로 이어붙인 것이다(그런면에서 만리장성 축조에 따른 모든 욕을 혼자 먹는 진시황은 조금 억울할것같다).


그래도 흉노, 말갈족 등 북방 유목민들은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하지만, 서쪽 유목민들은 미지의 존재였다. 한(漢) 무제의 실크로드 개척 이후 많은 왕조에서 서역을 평정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기 일쑤였다. 거대한 자연환경으로 가로막힌 미지의 땅을 무리하게 정복하려다 자칫 중원(中原) 지방의 기반마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漢)대나 당(唐)때 돈황이나 쿠처 등에 군(郡)이나 도호부가 설치된적도 있었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청 건륭제에 와서야 신장자치구 지역이 중국에 편입된다). 중국인들은 서역 땅의 유목민을 '오랑캐'라 폄하했지만, 사실 서역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일종의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만리장성 서쪽 끝은 실크로드 여정 중 가장 기대가 많던 곳이었다. 이 관문을 넘는 순간 진정한 실크로드 여행이 시작될 것 같았다. 물론 혹독한 더위와 추위속에서 풍천노숙(風餐露宿)하던 시절이 아니라, 시간당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을 타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호텔에서 쉬며 여행하지만, 마음가짐 만큼은 뭔가 결연해질 것 같았다.


가욕관은 기차역 이름부터 가욕관일 정도로 '가욕관을 위한 도시'다. 그렇다보니 가욕관이 없다면 누구도 찾지 않을 도시이기도 하다.


가욕관은 명나라 때인 1372년부터 건설됐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벽히 복원되어 오히려 영화 세트장 같은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구조와 방식 만큼은 옛날과 같다. 토벽인 외성과 벽돌을 쌓아 만든 내성의 이중구조다. 성벽위는 마차 두 대가 지나가도 끄덕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웅장하다. 그래서 가욕관을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 불렀다.


성벽을 걷는 건장한 남성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작아 보일 정도로 가욕관의 위용은 대단하다. 눈앞에는 기련산맥이 지평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있다. 기련산맥은 감숙성과 칭하이성를 구분짓는데, 감숙성을 여행하다보면 그림자처럼 늘 시야에 들어오는 산맥이다. '가욕관' 이라 새겨진 비석 앞에는 화려한 방석을 얹은 낙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첫번째 돈대인 '장성제일돈'까지 가는 일종의 교통수단(?)이다.

물론 80원(16,000원)이라는 비싼 돈을 내야 하지만, 낙타 체험을 해보고 싶은 어린 아이부터 40도가 넘는 땡볕에 걷기 힘든 노인들까지 낙타들은 잠시도 쉴틈없이 관광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가욕관 건설에 관해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개점이라는 이가 가욕관을 설계했는데 공사 전에 필요한 벽돌갯수를 정확히 계산했다. 여분으로 딱 한장의 벽돌만 추가했다. 공사가 끝나고보니 한장의 벽돌만 남았다고 한다. 얼마나 가욕관 건설에 공을 들였는지 알수 있다. 한장의 벽돌은 현재 가욕관 성벽에 전시되어 있다.




웅장한 가욕관의 모습





가욕관을 천하제일웅관이라 부른다






낙타 뒤로 기련산맥이 펼쳐져있다


양문관과 옥문관은 돈황 시내에서 버스로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양관과 옥문관을 이관(二關)이라 부른다. 시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는 돈황에서 갈라져 북쪽길은 옥문관을, 남쪽길은 양관을 지난다. <서유기>의 현장법사 또한 이곳을 지나 서역으로 향했다.


이관의 모습은 위용이 넘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처연했다. 깊은 외로움이 켜켜이 쌓여있는 슬픔의 장소였다. 가욕관이 화사한 장미라면, 옥문관과 양관은 곧 떨어질 마지막 잎새처럼 애달펐다. 허허벌판 황무지 위에 서있는 돈대의 풍경은 지극히 외로웠다. 그 옛날 이 곳을 지났을 누군가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해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감정은 비단 나만 느낀게 아니었나보다. 이백, 두보와 함께 중국 3대 시인이라 불리는 왕유는 서역으로 가는 벗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양관 입구에 적혀있다.


<위성곡> 송원이사지안서 (渭城曲, 送元二使之安西)

"위성땅 아침 비가 길을 적실 때 주막집 버드나무 싱그러운 잎새

여보게 한잔 더 들게나

서쪽 양관을 나서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적막천지 아니던가"



실크로드는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여정이다. 옥문관과 양관의 아득한 풍경은 날 또 다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이끌었다. 선입견이 깨지고, 다시금 새로운 감정으로 빈자리가 채워지는 여정이었다. 비움과 채움이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이었다.

지독하게 황량해서 쓸쓸함 마저 사치로 느껴지는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또 다시 난 그리움을 남겨놓고 길을 떠난다.




양관의 돈대





이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할수 있을까


옥문관


흔적만 남아있는 한(漢)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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