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그곳에서는 꽃피는 봄이기를
배우 김새론이 죽었다. 스물넷. 가장 아름다운 나이라고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나도 이 년을 앞서 그 나이를 겪었지만 내게 그것은 지옥의 한 파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그와 나의 두 살이라는 터울은 앞으로 갈수록 더 벌어질 것이다. 내가 계속 살아간다면. 오직 그 사실로 일면식도 없는 그의 죽음이 유독 마음의 비수로 파고든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아주 옛날부터 유명한 배우였던 것 정도만 알았다. 그 나이에 벌써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타고난 재능의.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찬란한 수식어들 속에서 그가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출연한 작품은 대부분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영화관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가 출연한 작품을 볼 수 없는 천재 배우. 언젠가 읽은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말했다. 자기는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정상적인 캐릭터를 맡아보지 못했다고. 늘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슬프거나 어두운 역할밖엔 없었다고. 그 인터뷰 뒤에는 웃음이라는 단어가 괄호에 갇혀 떠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 두 글자가 함께 실린 배우의 얼굴보다도 더 그림자진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천재로 사는 것도 쉬운 건 아니겠구나. 정상적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거창한 논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가 걸어온 길이 어린 시절부터 감당하기에 꽤나 버거운 짐이기는 했겠구나. 조금 짠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름과 얼굴만 간신히 아는 연예인에게 쏟을 감정의 크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인터뷰가 나온 당시 그는 아마도 중학생. 나는 십 대의 마지막 장을 정신없이 채우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깐 의식하다 나는 이내 그를 빠르게 잊었다.
그 이후 다시 어지러운 기삿거리 소재가 된 그를 발견한 것은 음주운전이라는 수식어 한복판에서였다. 오래전 봤던 인터뷰에서 느낀 안타까움이 불쑥 상기됐다.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의 팬도 안티도 아니었고 음주운전으로 논란의 중심이 된 연예인이 그가 처음도 아니었다. 악플들이 심하게 달리는 것도 같았지만 이또한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여지껏 보아왔던 수많은 사례들처럼 저러다 말겠거니 하고 관성적으로 넘겨짚었다. 그런데 그렇게 또 그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던 어느 날 아침. 그가 죽었다는 기사가 속보로 올라왔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이름을 김아임으로 개명했었다는 것. 스스로 처한 상황을 보다 나아지게 만들려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 그러나 여전히 차가웠던 수많은 시선들 속에서 오랫동안 앓아왔다는 것. 한줄한줄 읽으며 마음에서 신물이 비어져나오는 듯했다. 그가 느꼈던 아픔을 왠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만 같아서. 그걸 이제야 발견해서. 이제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비겁한 것 같아서.
대체 왜 세상에는 이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걸까.
나는 여전히 그의 팬도 무엇도 아니다. 여전히 그를 잘 알지 못하고 그의 생전 모습을 그릴 정도의 사소한 추억조차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는 용서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까. 음주운전은 응당 지탄받아야 할 본인의 중차대한 잘못이고 책임이다. 그러나 너무도 어린 나이부터 어른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하나의 고착화된 이미지로서 소비되도록 떠밀린 것.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정작 정신의 성숙함을 키울 여유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언제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원하지 않은 만큼의 기대를 멋대로 쏟아붓고서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비난을 쏟아붓는 것. 대체 언제부터 반복되어 온 비극이었을까. 이 비극에 끝내 삶을 먼저 내려놓은 것이 결코 김새론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당연한 일이 되지는 않는다. 언젠가 김새론이 말했듯이. 이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살아남았건 살아남지 못했건 우리는 지금 정상적이지 않은 세상을 떠받들고 있다. 관성적으로 떠받들며 그것이 지금 내 뼈와 살을 짓뭉개고 있음을 애써 무시한다. 살려고 발버둥치면 비웃음을 사고 비웃음을 살수록 더욱 더 낙오된다. 쓸모가 없어진 톱니바퀴는 하염없이 작아지다가 이내 굴러떨어진다.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또 관성적으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더는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아픔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그저 언제나 그래왔듯 흔하디 흔한 사례집으로 한데 묶어 뭉뚱그린 채로 파묻는다. 발견하기를. 그리고 서로 발견되기를 거부한다.
인간 김아임을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도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우리 세대의 인간이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을 가장 흔하게 접하며 성장기를 보낸 세대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을 때 우리는 초등학생이었다. 정치문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온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한쪽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그 이유로 그를 맹렬히 성역화하고 추앙하며 애도했고 또 한쪽에서는 완전히 같은 이유로 그를 극렬히 매도하고 비하하고 희화화했다. 이것은 색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였다. 갓 사회를 알아가는 눈을 뜨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에게는 특히나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이 양쪽 모두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준 어른은 많지 않았다. 자살로 인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 종결. 이 짧은 문장을 놓고서 그토록 지독하게 싸워대는 사람들을 그때 당시의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으로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가 존재함을 배웠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음을 배웠다. 그것이 남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지만 그 분노의 방향만은 서로 너무도 달라서 도저히 한 사람을 위해 같이 손을 모을 수는 없었음을 배웠다.
우리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세월이 지나 십 대가 되었고 세월호가 침몰했다.
또래 아이들이 죽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죽음을 맞았다. 교복을 입은 수백 개의 영정사진. 그 사진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눈빛들은 지나치게 생생해서 그들이 이미 세상에 없음이 믿기지가 않았다. 오히려 눈에 생기를 잃은 것은 이번에도 살아남은 쪽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싸웠고 삿대질을 했고 때론 죽음을 모욕하고 때론 죽음의 의미를 마모시켰다. 물론 예전에도 참사는 있었고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일도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소식들이 빠르게 퍼지고 그 빠른 속도에 걸맞는 전달방식의 숙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던 과도기에 벌어진 참사가 바로 세월호였다. 같은 반 친구가 죽었는데 기분이 어떻냐는 그 말도 안 되는 인터뷰를 비롯해서 온갖 가십거리와도 다르지 않은 논조의 기사들이 버젓이 속보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여과도 없이 송출됐다. 죽음. 죽음. 죽음. 날마다 숨쉬듯 그것들을 마주하도록 끝을 모르고 퍼날라지는 그 거친 언어들의 홍수에 휩쓸려 죽음이라는 것은 마침내 지겹도록 가벼워졌다. 슬픔은 분명 증폭되었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슬픔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에도 역시 분노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을 눈에 담으며 문득 살아남았다는 것에 절망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때 십 대였고 고작 그 나이에 생존자가 되었다. 어거지로 웃자랐고 마음에 새겨진 상흔을 애써 무시하며 마저 자랐다. 그리고 또 약간의 세월을 지나. 허울뿐인 어른이 되었다.
물론 이것이 우리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자로 잰듯 똑같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을 유독 가깝게 느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경험을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이 쌓아왔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이상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고 때로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더 그럴싸한 선택지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픔의 인과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분명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 서로 다르지 않은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점이 더 많다고 해서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그 실낱과도 같은 위로의 씨앗이 반드시 짓밟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와 비슷하게 젊은 생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그 사람이 한때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온 존재였고 현재를 살아가는 그 누구와도 다름없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었음을 헤아리는 것. 더는 그 사람에게는 위로를 건넬 수 없게 되었지만 앞으로나마 부디 닮은 고통을 겪는 우리를 알아가는 일에 인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한때 본인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따뜻한 격려 한 마디를 내어주는 것. 이 당연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이 지켜지고 품어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가 매서운 칼바람 앞에서 이만 견디고자 했던 이 비루한 세상이. 정말 조금이나마 더 온건해져서. 꽃피는 봄이 표표히 오기를.
배우 김새론이 아닌 인간 김아임이 실수하고 용서받고 성숙해지기를 반복하며 한 사람으로서 누렸어야 마땅했을 그 당연한 봄이. 남은 우리에게 와서 머물다 언젠가 그에게도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