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곧 꿈이었던 수많은 옥상 위의 아이들에게
덤블트리라는 생물이 있다. 어릴 때 동화책으로만 봐서 진짜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에베레스트산도 진짜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책이나 사진으로만 보고 그것이 실제라고 믿는다. 픽션이나 논픽션이라는 얄팍한 구분은 어차피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무의미한가. 단지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각막 너머의 상에 프레임을 투영할 뿐이다. 그렇게 보면 사실 진짜 실제라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덤블트리라는 생물이 있었다. 덤블트리는 뿌리가 있지만 그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는다. 내릴 수 없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덤블트리는 단지 거대한 사막을 표류하듯이 떠돌아다닐 뿐이다. 목적이 없으면 표류고 보물을 찾아 떠나면 모험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덤블트리의 목적은 무엇일까. 적어도 보물은 아닐 것 같다. 덤블트리는 어차피 보물을 찾아봤자 그걸 지킬 울타리도 둥지도 없다. 그렇다면 덤블트리는 어쩌면 스스로가 보물이 되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가지는 뻣뻣하게 말랐고 가지랑 꼭 닮은 뿌리는 그 어떤 오아시스에도 정착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그의 존재는 보물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덤블트리의 패러독스가 생성된다. 자기 자신이 이미 보물인데 그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다면 표류도 탐험도 할 수 없는 그의 존재는 뭐란 말인가. 귀신일까.
아마도 우리의 덤블트리에게는 지평좌표계가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은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어쩌면 픽션일지도 모르고 논픽션일지도 모른다. 판단은 보물을 알아봐 줄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하지만 보물을 보고도 돌을 보듯 하는 수많은 어른들에게는 아마도 이것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조차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가감 없이 말하겠다. 찰나의 순간이 새겨진 사진 한 장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무덤 한켠에 몰래 묻어놓듯이.
순간 하나. 아이는 옥상 위에 혼자 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로 된 턱은 고작 무릎 높이다. 아이는 턱에 걸터앉아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쾅. 아래로 떨어지는 상상을 한다. 퍽. 쾅보다는 퍽이 더 설득력 있으려나. 하지만 옥상은 지면으로부터 삼 미터 높이도 되지 않는다. 여기서 떨어져 봤자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떨어지는 사람이 다 자란 사람이었다면.
이 아이는 다섯 살이다. 놀랄 것도 없다. 한 연구자료에서는 아이들이 처음 가출을 결심하는 나이가 최소 여섯 살부터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픽션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의 존재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인식은 너무도 원초적인 감각만으로도 인지할 수 있는 것이어서 훨씬 더 어린 나이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그 이후의 계획을 세우기에 너무 어릴 뿐이다. 그래서 아이는 집에서 집의 지붕과 연결된 옥상으로 가출했고 그 옥상에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상상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아이가 이미 다섯 살이나 먹었다는 것이다. 한 살이라도 더 어렸더라면 이 높이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다섯 살을 먹은 만큼 키가 커버린 아이는 어쩌면 여기서 떨어지더라도 죽지 않을 것만 같다. 다리만 부러져서 붕대를 아주 많이 감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겠지. 상상이 거기까지 미친 뒤에야 아이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집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내일 또다시 이곳에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며 같은 상상을 하리라는 것을 아이는 이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순간 둘. 아이는 여전히 다섯 살이다. 다만 옥상의 철문에는 굳게 자물쇠가 채워졌다. 바로 어제 근처를 지나가던 이웃사람이 왜 저런 어린애가 혼자 저런 곳에 올라가 있냐며 놀란 얼굴로 대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이제 가출을 하는 대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그 계단 한 칸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다. 참 좋은 집이다. 여기에 하루종일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햇빛의 세기와 그림자의 기울기에 따라 하얀 담장이 온갖 무늬를 띄며 변모해 가는 다채로운 광경도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닌 담장이지만 이 아이에게 이것은 유희거리의 전부다. 이곳은 아이의 외갓집이었고 아이는 동네 다른 아이들에게 천애고아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사실 아이는 자신을 이곳에 맡긴 엄마가 진짜 엄마인지도 의문이다. 아이에게는 지금까지 손에 다 꼽기도 버거울 만큼 많은 엄마와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나에겐 이렇게 엄마랑 아빠가 많으니까 나는 절대로 고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들 중 누구도 나를 발견하러 와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설령 그들이 전부 진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순간 셋. 아이는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실 진짜 엄마라느니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다. 원래 엄마는 한 명인 거고 한 명인 것에 진짜니 가짜니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너는 엄마가 몇 명이냐고 물어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상한 애를 보는 듯한 친구의 눈빛에서 아이는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농담이야.
농담이라는 것은 참 쉬운 변명이다. 그렇게 논픽션은 다시 설 곳을 잃는다.
순간 넷. 아이는 아홉 살이 되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책을 많이 읽은 백과사전 같은 아이라고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한 친구가 아이에게 너는 지옥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주저 없이 지옥은 어릴 적 내 외갓집이었다고 대답한다.
아이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적지 않은 집에 맡겨졌었지만 날마다 죽음을 갈망하게 만든 집은 오직 그곳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더 많은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에 그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세상에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다섯. 아이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진짜 엄마와 진짜 아빠가 있는 진짜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마침내 한 명의 엄마와 한 명의 아빠와 함께 평범하게 살게 되었지만 그곳은 내가 가짜여만이 진짜가 될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어차피 어릴 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학교에 다니는 이제부터라도 원래부터 같이 살았던 것처럼 살면 모두가 우리집을 단란한 가정으로 여길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 겉으로 보여지는 단란함을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이자 꼭두각시였다.
한 드라마에서 쇼윈도부부라는 표현을 처음 듣고서 아이는 딱 우리집에 어울리는 말을 찾은 것 같아 아주 오랫동안 크게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웃어도 그건 진짜 우스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아이는 부속품이자 꼭두각시로만 살기에는 너무도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마른 장작더미 같지만 실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고 나아갈 줄 아는 불행한 덤블트리처럼.
순간 여섯. 아이는 나이를 더 먹어 중학생이 되었다. 처음 입어보는 교복은 구속이었지만 집이 아닌 다른 소속이 생긴 것 같아 기뻤다. 공동체와 소속감은 아이가 아주 오랫동안 갈망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강행되는 운동장 조례에서 바보 같은 가사의 교가를 부를 때조차 저절로 목소리가 들뜰 만큼 기쁘고 신이 났다. 비록 학교라는 공동체가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아이에게 그곳은 처음으로 한 명의 사람으로 숨 쉴 수 있게 허락해 준 공간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학교 담장의 삼엄하기 짝이 없는 붉은 벽돌을 바라보며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충성을 남몰래 맹세하기까지 했다. 훗날 돌이켜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 당시 아이의 얼굴은 단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엄숙했을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바로 그해의 일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선 날이면 날마다 소문이 무성했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 실체는 아무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사건 이후로 학교 옥상의 철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꼭대기층으로 가는 계단 근처에만 있어도 선생님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상주하며 이따금씩 아이들을 붙잡고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어른도 아이들이 묻는 것에는 대답해주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그저 막연히 추측하며 소설을 쓰듯 소문과 소문을 실어나를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 옥상에서 누군가 죽으려 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오 층짜리 건물을 가득 채운 수백 명의 아이들과 수십 명의 어른들 중 그 누구도.
단지 옥상의 무거운 자물쇠만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결코 날조된 픽션은 아니라는 것을 외롭게 증명하고 있었다.
순간 일곱. 거듭되는 소문과 부인과 부정과 선긋기에 지친 선생님들은 어느 날부턴가 뭘 하려거든 제발 학교 밖에서 하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만 아니라면 뭘 하건 상관 안 할 테니까 제발 밖에 나가서 하라고.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도 학교라는 공동체에서도 추방받은 아이가 갈 곳이라곤 결국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길거리밖엔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곳에서 똑같이 추방당한 다른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이들이 날마다 가출을 했다. 다만 일상적인 가출이 되어 아무도 더는 관심을 주지 않을 뿐이었다. 그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갔다가 학원이 끝나면 독서실에 갔다가 새벽 세 시쯤 독서실의 점검시간이 되면 밖에 나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벤치에 누워 잠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쯤 다시 독서실에 가서 등교할 때까지 다시 잠을 잔다. 아이는 주로 새벽 세 시에 독서실을 나올 때 그런 아이들 중 한 명과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너도 집에 들어가기 싫은 것 같은데 벤치에서 같이 자자고 그 아이는 말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나눠준 사탕을 먹으며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아무도 내가 몇 시에 들어오는지 신경 쓰지 않는 집에 굳이 들어가는 건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십이 층의 베란다에서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나는 지금이야말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시나마 웃었다.
내가 어디에 소속된 구성원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숨 쉴 수 있는 때는 오직 난간에 매달려 고공에 팔다리를 뻗어보는 그 순간뿐인 것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옥상에 올라가 죽음을 가늠했던 다섯 살의 그때처럼.
이 모두는 어쩌면 가짜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아이들이 하나같이 빛나는 보물이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높이로 본다면.
다만 어린 시절 내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둥그런 브라운관 티비에서 흘러나오던 어느 만화영화의 목소리에서처럼 문을 열며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면 어서 오렴 대답해 주는 그런 집. 그런 따뜻한 공기. 사랑이라고 하기 낯 부끄럽지만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 무슨 말로도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것.
대답할 사람 따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다다를 때마다 큰 소리로 다녀왔습니다라고 혼잣말을 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이 순간들 중 하나에서부터 스며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순간과 순간은 단지 나이를 더 먹었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다녀왔습니다라는 혼잣말을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상상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덤블트리다.
그리고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많은 아이들처럼 멍청하게도 진짜 집이라는 꿈을 꾸느라 표류도 탐험도 하지 못한 채 뜨거운 사막에 데인 앙상한 뿌리를 차마 거두지도 거느리지도 못한다. 단지 오늘도 박제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곳에서 이렇듯 숨을 쉬고 있을 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