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광장, 그리고 살해당한 낭만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敵)으로 만든 학부제라는 덫

by 박온유

1996년, 봄은 왔지만 우리의 캠퍼스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문민정부의 출범 이후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타도하고 싶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푸른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서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며,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목이 터져라 외쳤던 "5월 학살자 처벌"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승리였다. 분명한 승리였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이 공허함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거대하고 악랄했던 '공공의 적'이 사라지자, 운동권의 구호는 길을 잃었다.

아직 우리에겐 "미제 축출"이 남았고 "자주 통일"이 남았지만,

독재 타도라는 선명한 명분이 사라진 거리에서 대중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잖아. 이제 그만 좀 해."

그 무관심은 백골단의 곤봉보다 더 아프게 뼈를 때렸다.


우리의 열정은 갈 곳을 잃었고, 그 틈을 타 자본과 학교는 아주 영리하고 잔인한 '새로운 질서'를

들이밀었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우리에겐 '낭만'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학과제'가 있었다. 입학하는 순간, 우리는 '00 학과'라는 하나의 부족(Tribes)이 되었다.

선배는 하늘이었지만 동시에 든든한 형이자 누나였고, 후배는 철부지였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동생들이었다.

신입생 환영회(OT) 때부터 우리는 하나였다.


강당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밤새 막걸리를 마시며 "바위처럼"을 불렀고,

어설픈 율동을 배우며 서로의 눈빛을 익혔다.

봄이면 새내기 배움터를 떠났고, 여름이면 농활을 갔으며, 가을이면 모꼬지(MT)를 떠났다.

모닥불 피워 놓고 통기타 소리에 맞춰 부르던 노래들.

돈이 없어도 선배는 후배들의 밥값을 냈고, 후배는 선배의 고민을 들으며 인생을 배웠다.

"형, 저 밥 사주세요." 그 한마디면 모든 게 해결되던 시절이었다.


시험 족보는 대물림되는 가보였고, 강의실은 공부하는 곳이자 토론하는 광장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성적을 질투하지 않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강의실 옆자리의 친구가 아니라, 강의실 밖의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끈끈한 '연대(Solidarity)'가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는 '학부제(Faculty System)'라는 이름의 괴물을 도입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전공 선택의 자유'와 '경쟁력 강화'였지만, 실상은 '학생 사회의 해체'였다.


신입생들은 이제 '학과'라는 둥지 대신, 전공도 소속도 없는 거대한 수용소 같은 학부로

몰아넣어졌다.

그리고 잔인한 룰이 선포되었다.


"1년간 죽도록 경쟁해라. 그리고 2학년 때 성적순으로 원하는 전공을 골라라."


이 룰은 대학의 모든 낭만을 단숨에 도살해 버렸다.


가장 인기 있는 전공, 취업이 잘되는 전공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 옆에 앉은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했다.

어제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술잔을 부딪치던 동기가, 오늘부터는 내가 가고 싶은 학과의

정원을 갉아먹는 잠재적 '적'이 되었다.


OT와 MT는 사라졌다. 소속이 없는데 누구와 여행을 간단 말인가.

선배들은 챙겨줄 직속 후배가 없어져서 씁쓸해했고,

후배들은 밥 사줄 선배를 찾지 못해 헤맸다.

모꼬지의 모닥불이 꺼진 자리에는, 도서관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만이 남았다.


나는 학생운동으로 성적이 위험한 수위였기에 미등록 제적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광장이 사라진 나는 살기 위해 재입학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진 강의실 풍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예전엔 수업에 빠진 친구를 위해 대출도 해주고 노트를 복사해 주는 게 미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노트를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정보는 공유되지 않았고, 족보는 암시장 거래처럼 은밀하게 몇몇끼리 만 돌았다.


도서관은 전쟁터였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자리를 맡아야 했고,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가방이 치워졌다.


그 숨 막히는 정적. 책 넘기는 소리조차 눈치가 보이는 그 살벌한 공간에서, 나는 질식을 느꼈다.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고작 이런 것이었나? 독재를 몰아내고 얻은 자유가,

고작 친구의 등을 쳐다보며 경쟁하는 자유였나?


총학생회 선거 유세장도 변했다. "민주주의 수호"나 "노동 해방"을 외치던 후보들은 사라졌다.

대신 "도서관 좌석 확충", "학생 식당 가격 인하", "스쿨버스 증차"를 공약으로 내건

비권(非權) 후보들이 등장했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표를 던졌다. 당장 내 학점, 내 밥값이 중요했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운동권은 '시대착오적인 화석' 취급을 받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다.


재입학금을 내고 돌아온 나는, 그 바뀐 세상의 한복판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나는 여전히 민중가요가 흥얼거려지는데, 후배들의 이어폰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여전히 사회의 모순이 보이는데, 그들은 토익 점수와 학점 0.1점에 목숨을 걸었다.


술자리도 사라졌다. 학교 앞 잔디밭(속칭 '노천')에서 깡소주를 까며 밤새 토론하던 문화는

미개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스펙을 쌓으러 학원으로, 고시원으로 사라졌다.


"외롭다."


그것은 단순히 친구가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던 세계가,

내가 믿어왔던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는 본질적인 고독이었다.


광장은 넓고 깨끗해졌지만, 그곳엔 더 이상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학우'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같은 공간에서 숨만 쉬고 있는, 성적표라는 바코드가 찍힌 경쟁자들일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20대,

우리의 낭만은 학부제라는 시스템 아래서 소리 없이 질식해 죽어갔다.



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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