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의 귀환
대학에 입학한 시점부터 나는 강의실보다 아스팔트 위가 더 익숙했다.
시작은 정말 찰나였다.
신입생 OT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던 중, 나는 언니에게 배운 민중가요를 불렀다.
갓 스물의 앳된 목소리로 부르던 그 떨리던 노랫가락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선배가 내 손을 낚아채듯 이끌었고, 그 길로 나는 총학생회 해오름식 무대에 올랐다.
신입생 최초로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던 그 무대는 나의 본격적인 투쟁의 삶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후 나의 삶은 교정의 낭만이 아닌 거리의 함성과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채워졌다.
결국 1학년 내내 학점 경고를 받았고, 나는 조금씩 시스템의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학교라는 거대한 기계가 나를 부적격자로 판정해 지워버리기 전에, 나는 스스로 '미등록 제적'을 선택했다.
그것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내 사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자 전략적 망명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유령의 시간은 2년이나 이어졌다.
나는 학교에 적은 없으나 학교를 결코 떠나지 않는 유령으로 살았다.
해가 지면 동료들과 함께 차가운 학생회관 바닥이나 선배들의 좁은 자취방으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을 청했고, 이튿날이면 사복 경찰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다시 학교로, 혹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다음 집회를 준비하며 몰래 모여 모의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의 눈엔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그림자였으나, 서로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 선명하고 뜨거운 빛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로 사는 시간은 영원할 수 없었다.
사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망명이었지만, 현실의 중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부모님의 기대는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파도처럼 시시때때로 나를 덮쳐왔다.
결국 나는 살기 위해 다시 그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재입학.
그것은 흔히 말하는 '돌아온 탕자'의 감동적인 귀환이 아니었다.
비싼 입학금을 다시 헌납하고, 행정실 앞에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졸업장이라도 따게 해 주세요"라고 비는 패배자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의 내가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며 내던졌던 그 자존심을, 다시 전당포에 맡기듯
입학금을 지불하고 되찾아오려 애쓰는 꼴이었다.
한때 당당했던 투사는 죽었고, 이제 생존이라는 영수증을 구걸하는 초라한 복학생 하나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돌아온 학교는 변해 있었다. 아니, 더 노골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 대학의 총장은 교육자라기보다는 탁월하고 교활한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학교의 외부 평판을 올리기 위해 '장학금 수혜율'이라는 숫자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
학교가 학생을 얼마나 깊이 아끼느냐는 본질보다,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돈을 '뿌렸느냐'는 통계 수치가
대외 홍보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이렇게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줍니다"라는 그 달콤한 홍보 문구 뒤에는 '쪼개기'라는
더러운 셈법이 숨어 있었다.
장학금 명단이 발표되던 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학부 수석 단 한 명에게만 전액, 극소수에게 반액.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에게 주어진 것은 등록금의 10분의 1이었다.
10분의 1이라는 숫자를 보는 내 눈꺼풀은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이건 격려도 보상도 아니었다. "옛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길거리의 걸인에게 동전 몇 푼 던져주며
생색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야말로 '빵 부스러기'였다.
총장은 이 푼돈을 수백 명에게 고루 뿌려 수혜율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완성했고,
우리는 그 통계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동원된 일회용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 부스러기 같은 돈으로는 등록금은커녕, 한 달 기숙사비도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상황을 바꿀 수도, 그 모욕적인 돈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장학금으로 부족한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매워야 했고 생활을 위해 부모님께 돈을 받아 쓰는 것은
학교 생활을 제도에 맞춰 해내지 못해 제적과 재입학을 한 내 입장에서는 너무나 창피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정의를 외치던 나의 입술은 배고픔 앞에 침묵을 강요당했고,
나는 그 치사하고 더러운 돈을 받아 챙겼다.
장학금 수령 확인란에 서명하던 날,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맛이 났다. 자존심이 맷돌에 씹혀 나가는 맛이었다.
예전의 내가 명동성당 계단에서 씹었던 소라빵이 가난하지만 고결한 '위로'의 맛이었다면,
지금 내가 받아 든 이 장학금은 비굴하지만 달콤한 '모욕'의 맛이었다.
나는 그 비릿한 맛을 억지로 삼키며 다시 강의실로 향했다.
현실은 그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나는 '근로 장학생'까지 신청해야 했다.
그마저도 일자리가 부족해 동기들과 경쟁을 뚫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배정받은 곳은 자연대 화학관 4층 실험실이었다.
나의 일과는 단순해서 더 비참했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의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그들이 '고귀한 실험'을 마친 뒤 남겨진 찌꺼기들을 치우는 일.
벤젠과 아세톤 같은 유기 용매 냄새가 진동하는 실험실에 홀로 남아 산더미처럼 쌓인 비커를 닦는 것이
내 하루의 전부였다.
독한 약품 냄새가 코점막을 찔렀고, 고무장갑을 낀 손은 습진으로 살점이 벗겨져
차가운 수돗물이 닿을 때마다 따갑게 비명을 질렀다.
풍경은 더 잔인했다. 창밖으로는 캠퍼스의 평화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누군가는 낭만을 즐기며 잔디밭을 가로지르는데, 나는 4층이라는 투명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수천 번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환풍기가 무심하게 돌아가는 기계음뿐이었다.
공대도 아닌 자연대 화학과, 여자가 취업하기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이 척박한 전공.
투명한 비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 이십 대는 실험실 하수구로 흘러가는 시커먼 폐수처럼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것, 무너진 자존심의 잔해 위에서 졸업장이라는 영수증을 향해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리는 것.
나의 뜨거웠던 투쟁은 한 줌 재도 되지 못한 채 비커 속 비눗물과 함께 사라져 갔다.
나는 그렇게,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시스템의 무력한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