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패 선배가 내려준 동아줄, 그리고 인쇄소의 밤
정우를 울산행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난 뒤,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
강의실에 앉아 있어도 귀에는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칠판에 적힌 화학식들은 마치 외계어처럼 부유했다. 나는 살길을 찾아야 했다.
비커를 닦는 푼돈으로는 이 거대한 IMF의 파도를 넘을 수 없다는 걸,
정우의 빈자리가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때, 낡은 메모장을 뒤적이다가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노래패 시절, 내가 무대에서 땀 흘리며 노래할 때 묵묵히 뒤에서 음향 콘솔을 만지던 학과 선배.
운동권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 끈끈한 정이 있었지만, 졸업 후 연락이 뜸했던 형이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형, 저예요. 학교 앞인데... 소주 한잔 사주세요."
선배는 학교 앞 허름한 주점에 앉아 내 푸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너 그림 좀 그리지 않았냐? 대자보랑 걸개그림도 네가 다 했었잖아."
선배가 툭 던진 말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너 포토샵 같은 건 아냐?"
"네, 저 포토샵이랑 3D 툴 좀 만지작거리고 있어요. 학교 전산실에서요."
선배는 피식 웃더니 명함 하나를 건넸다. [OO 기획]. 그의 친누나가 운영하는 인쇄 기획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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