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이라는 마취제

돈, 명품. 하지만 썩어가는 속

by 박온유

텐프로의 에이스가 되고 내 손에 쥐어진 돈은,

IT 노가다를 뛸 때 벌던 그 정직한 돈과 질감이 달랐다.

그것은 내 자존심을 난도질하고,

내 지성을 광대놀음의 도구로 전락시킨 대가로 받은 '화대(花代)'였다.


액수가 클수록 내 영혼이 뜯겨나간 상처도 깊었다.

어떤 날은 현금으로만 수백만 원을 핸드백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퇴근했다.

택시 안에서 그 돈다발을 내려다보면,

마치 내 내장을 꺼내놓은 것처럼 역겹고 비릿했다.

나는 이 '더러운 느낌'을 빨리 씻어내야 했다.


돈을 모은다? 미래를 준비한다? 그런 건 사치였다.

당장 오늘 밤 잘려 나간 내 멘탈을 봉합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 돈을 내다 버리기 시작했다.


백화점 명품관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직원들이 나를 '사모님', '고객님'이라 부르며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들의 가식적인 친절이 역겨우면서도,

동시에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래, 나 돈 많아. 나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날 무시하지 마."

나는 쇼핑을 한 게 아니었다. 발작을 일으킨 거였다.


가격표 따위는 보지 않았다.

나에게 어울리는지,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가장 비싼 것, 남들이 못 가져서 안달 난 신상품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줄부터 저 줄까지, 다 포장해 주세요."


수천만 원이 결제되는 순간의 그 짧은 '찌릿함'.

뇌 속에서 도파민이 터져 나오며 잠시나마 내가 '술집 여자'라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 강력한 마취제였다.

나는 그 순간을 사랑했고, 경멸했다.


하지만 마취는 백화점 문을 나서는 순간 풀리기 시작했다.

양손 가득 화려한 쇼핑백을 들고 돌아온 나의 오피스텔.

현관문을 열면 그곳은 집이 아니라 거대한 쓰레기장이자 무덤이었다.


거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샤넬의 검은 박스,

에르메스의 오렌지색 박스들이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개봉조차 하지 않은 명품 가방들,

한 번도 신지 않은 이태리제 구두들.

그것들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너는 이 비싼 껍데기들 속에 숨어 우는 겁쟁일 뿐이야."


나는 수천만 원짜리 가방 더미 옆에 쭈그리고 앉아 편의점 컵라면을 먹었다.

목이 메어 라면 국물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1억을 쓰든 2억을 쓰든, 내 영혼의 허기는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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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는 울보. 사람이 사랑이라 읽히게 될 날을기다리는 바보. 사랑하여 글을 쓰고 노래를 짓는철 들기 싫은 노래쟁이. youtube.com/@OnYou-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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