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자율성은 손이 깨끗한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나는 오래전에 배웠다.
선택지가 하나로 고정되는 순간, 인간은 반드시 맞거나 도망쳐야 한다는 걸.
내 싸움은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왼손은 마이크를 잡았고, 오른손은 허공을 갈랐다.
문선대로서 노래가 끝나면 무대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보도블록과 최루탄, 그리고 도망칠 골목뿐이었다.
구호는 사람을 모았지만, 사람을 지켜주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알았다.
판 위에 올라간다는 건 구경한다는 뜻이 아니라, 대가를 치른다는 뜻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단일한 선택을 믿지 않는다.
하나의 정의, 하나의 편, 하나의 답.
그건 가장 빨리 사람을 죽이는 구조다.
지금 세계가 다시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전쟁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상상하던 방식의 전쟁은 아니다.
대신 세계는 지역 패권과 블록으로 나뉘고 있다.
총과 미사일 대신 공급망, 기술 표준, 에너지, 금융, 규범이 무기가 된다.
이 질서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는 강대국이 아니라, 선택지가 하나로 고정된 나라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한국을 ‘중견국’이라 부른다.
끼어 있는 나라, 줄을 잘 서야 하는 나라.
하지만 그 말은 이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은 이미 판 위에 있다.
GDP, 산업, 기술, 민주주의, 문화 영향력까지.
G7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 G7이 다루는 문제를 이미 함께 감당하는 나라다.
문제는 지위가 아니라 태도였다.
우리는 너무 오래 스스로를 관중석에 앉혀두었다.
여기서 ‘전략 자율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외교 기술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의 문제다.
전략 자율성은 모두에게 욕을 먹는 선택이다.
미국에서는 “왜 더 확실하지 않으냐”는 소리를 듣고,
중국에서는 “왜 믿을 수 없느냐”는 소리를 듣고,
국내에서는 “우왕좌왕한다”는 공격을 받는다.
지지도가 약한 정부는 이 선택을 할 수 없다.
설명하기 전에 무너진다.
지금 이재명 정부의 파워 지지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건 단순한 호감이나 일시적 결집이 아니다.
“결정해도 된다”는 민주적 허가다.
민주주의에서 외교는 국민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만큼만 움직인다.
지금은 그 범위가 넓어져 있다.
그래서 가능한 선택들이 있다.
안보에서는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되,
산업과 기술에서는 협상 주체로 행동하는 것.
중국과는 적대 프레임을 관리하면서도 의존을 구조적으로 줄이는 것.
일본과는 감정 정치와 기술 협력을 분리하는 것.
유럽과는 규범과 산업 정책에서 연대하는 것.
이건 중립이 아니다.
책임 회피도 아니다.
이미 판 위에 올라온 나라의 태도다.
러시아 문제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러시아가 한국과 협력을 언급하는 것은 가치 동맹의 신호가 아니다.
중국 단일 종속을 피하려는 러시아의 계산 속에서,
한국이 독립적 행위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뜻에 가깝다.
이건 친러도, 반러도 아닌 현실이다.
나는 예전에 노래가 끝나면 돌을 집어 들었다.
그 돌은 작았고, 나의 도망은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때 배운 건 하나다.
선택지가 하나로 고정되면,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지금 한국 앞에 놓인 선택도 같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선택지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전략 자율성은 멋있는 구호가 아니다.
손이 더러워지는 선택이고, 오래 욕을 먹는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선택지를 지키지 못하면,
언젠가 다시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도망쳐야 한다는 걸.
나는 그 연기를 이미 들이마셔 본 사람이다.
그래서 말한다.
한국은 더 이상 관중이 아니다.
이미 판 위에 있다.
이제 남은 건,
얼마나 끝까지 버틸 수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