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프레티

Extrajudicial execution.

by 박온유

알렉스 프레티(Alex Pretti, 37)는 중환자실 간호사였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재향군인 의료시스템에서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했고,

미국 재향군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재향군인회는 밝혔다.


2021년 취득한 간호사 면허는 올해 3월까지 유효했다.

그는 미네소타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주니어 사이언티스트”로 근무했던 경력도 링크드인에 남겼다.

전과도 없었다. 총기도 합법적으로 소유했다.

그리고 그는 이민 단속 중이던 연방 요원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국 내부에서 “사법절차 없는 사형집행(extrajudicial execution)”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늦었다.

영장, 재판, 판결이라는 헌법적 절차를 건너뛰고 시민의 생명을 박탈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단속도 사고도 아니다. 집행이다.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않는 순간, 범죄는 제도 속으로 숨는다.

그리고 제도 속으로 숨은 폭력은 반복된다.


프레티의 직업이 왜 중요한가. “간호사”라는 단어가 감정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간호사는 생명을 지키는 시스템의 최전선에 있는 직업이고,

특히 중환자실은 매일 죽음과 맞붙는 자리다.

그가 수행해 온 일은 국가가 유지되어야 할 최소한의 약속—생명을 살리는 약속—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그 생명을 국가가 절차 없이 빼앗는다면, 그건 단속의 실패가 아니라 국가 약속의 파기다.


더구나 이 사건이 가진 구조적 공포는 “누가 죽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였느냐”에 있다.

합법 총기 소유, 무전과, 직업, 시민으로서의 신분—이 모든 것이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이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민권의 조건화다.

“필요하면 너도 예외가 아니다.”

이 신호가 사회에 각인되는 순간, 법은 보호막이 아니라 위험 신호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법을 믿지 못하고, 공동체는 서로를 의심하며, 국가는 더 강한 힘으로 ‘질서’를 관리하려 든다.

민주주의는 쿠데타로만 무너지지 않는다. 정당화된 폭력의 반복으로 마모되어 사라진다.


이 사건을 “현장 요원의 과잉 대응”으로 줄이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책임이 현장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폭력 자체가 아니라

책임 없는 폭력이다. 책임이 올라가지 않는 폭력은 규범이 되고, 규범이 된 폭력은 다음 희생자를 만든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책임의 구조를 끝까지 추적하는 일이다.


그 추적이 도착하는 곳은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다.

미국 재향군인회(VFW) 회장 에버렛 켈리는 “이 비극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책임감 있는 리더십과 긴장 완화 대신, 무모한 정책, 선동적인 언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위기를 선택한 행정부를 지목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애도 성명이 아니다. 원인 규명이다.

폭력은 현장에서 실행되지만, 폭력이 가능해지는 환경은 위에서 만들어진다.

집행 권력이 “성과”를 요구받을 때, 현장은 속도를 택한다. 현장이 속도를 택하면, 절차는 비용이 된다.

절차가 비용이 되는 순간, 생명은 ‘부수적 손실’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누가 설계했는가.

정치는 언제나 설계자다.


미니애폴리스 재향군인 의료시스템 관련 노조 또한 “우리 노조원이 오늘 목숨을 잃었다”며 참담함을 밝혔다. 노조의 언어는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노동과 제도의 언어다.

“노조원”이라는 단어는 그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증명한다.

그는 실재하는 시스템의 구성원이었고, 역할을 수행했고, 관계 속에서 살았고,

어떤 공동체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그를 죽였다.

이 모순이야말로 사태의 본질이다.


트럼프를 비판한다는 것은 특정 인물의 성격이나 도덕성을 공격하자는 뜻이 아니다.

이 칼럼이 겨누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정치가 만든 구조다.


트럼프의 정치가 반복적으로 사용해 온 방식은 ‘공포의 관리’다. 위협을 과장하고, 위기를 조성하고,

그 위기 속에서 집행 권력의 재량을 넓히는 방식. 이때 “강경함”은 정책이 아니라 서사다.

그리고 서사는 현장의 손을 가볍게 만든다. 방아쇠를 당기게 만드는 것은 훈련만이 아니다. 정당화다.

“지금은 비상이다”라는 문장 하나가, 절차를 밀어내고 폭력을 앞세운다.


이 사건이 미국에 남기는 파장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 헌법적 절차를 무너뜨리는 장면은 세계의 규범을 약화시킨다.

권위주의 국가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도 했잖아.” 이 한 문장이 인권을 협상 카드로 만든다.

국제 질서는 ‘법’이 아니라 ‘힘의 언어’로 다시 이동한다. 미국이 그 흐름을 촉발한다면, 그 피해는

국경을 넘어간다. 오늘의 총성은 내일의 모방이다.


더 위험한 것은 기술과 결합된 국가 폭력이다.

감시 데이터, 신원 확인, 작전 효율화, 무장 집행력이 결합하면 폭력은 속도를 얻는다.

속도를 얻은 폭력은 확산한다. 오늘은 이민 단속, 내일은 시위, 그다음은 “질서 유지”라는 이름의 일상

통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시민’이 아니라 ‘대상’이 된다.

대상이 된 인간에게 절차는 사치로 취급된다. 그 끝은 언제나 같다.

사법 없는 집행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단순하다.
이 사건을 단지 “ICE의 과잉”으로 끝내면, 다음 죽음은 예정된다.
책임이 현장에서 멈추면, 정책은 수정되지 않는다.
정치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폭력은 반복된다.


알렉스 프레티는 중환자실 간호사였다.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유했고, 전과도 없었다. 재향군인 의료시스템에서 일했고,

재향군인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노조는 동료를 잃었다고 애도했고, 재향군인회 회장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행정부의 선택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이 칼럼이 겨누는 칼끝은 바로 거기다.
현장만을 비난하는 순간, 우리는 책임을 놓친다.
책임은 위로 올라가야 한다.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종착지에서 우리는 이름을 말해야 한다.


트럼프.


그를 겨누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책임의 언어다.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애도문이 아니라, 애도에서

멈추지 않는 정치적 문장이다.

“다시는”이라는 말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수정으로만 성립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다음 총성은 시간문제다.


세계는 지금 미국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한 간호사의 죽음이 무엇을 폭로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회피한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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