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몰락과 사유의 빈곤

우리 아이들은 왜 '괴물'의 논리에 매혹되는가

by 박온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풍경은 기이하다.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정보를 훑을 수 있는 초연결 시대라지만, 정작 그 길목에 서 있는 10대와 20대의 지적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해 보인다.

문해력 저하라는 말은 이제 진부한 통계가 되었고, 어휘력의 결핍은 타인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 텅 빈 지성의 자리에 비판적 사고 대신 극단적인 혐오와 왜곡된 논리가 독초처럼 자라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왜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은 채, 누군가 정교하게 설계한 '이상한 논리'의 포로가 된 세대를 목도하게 되었는가.


나는 흔히 말하는 1970년대생이다.

누군가는 이 세대를 향해 ‘무시무시한 능력을 갖춘 집단’이라 평하기도 한다.

실제로 70년 대생들은 아날로그의 흙먼지 속에서 자라나 디지털 문명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낸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탄생, 그리고 지금의 AI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거대한 산업적 변곡점들을 능동적으로 돌파해 온 이들이다. 이들의 저력은 역설적으로 '결핍'에서 나왔다.


부족한 것이 많았기에 스스로 사회를 구성해야 했고, 골목길에서 또래들과 부딪히며 '깍두기' 문화 속에서 서툰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가는 법을 몸소 익혔다.

그렇게 다져진 사회적 근육과 생존 본능은 어떤 기술적 변화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었다.

나 역시 그 세대의 흐름 속에 있으며, 지적인 면에서 스스로를 그 최상위에 두고 단련해 왔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괴테의 《파우스트》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탐독하며 자아의 균열과 구원을 고민했던 기억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뿌리다.


나에게 텍스트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렌즈였고,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나만의 논리를 구축하는 성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서 그런 치열한 사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읽는 대신 '보고', 사유하는 대신 '검색'한다.


지금의 10대들이 극단적인 혐오 서사에 쉽게 경도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문해력이 무너진 자리에 '서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긴 호흡의 텍스트를 견뎌내지 못하는 뇌는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구호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힘이 없으니, 누군가 던져주는 명쾌해 보이는 '가짜 정답'에 열광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라는 감옥에 갇혀 확증 편향의 괴물이 되어가는 아이들에게,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심리적 여유'나 '사회적 지능'은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것은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사고의 기초 체력을 길러주지 못한 시스템의 부작용이다.


이 지독한 사유의 가뭄을 끝내기 위해 나는 '독후감'이라는 시스템의 복원을 강력히 제안한다.


과거의 독후감이 비록 시대적 배경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식이 지닌 본질적인 힘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내고, 그 안에서 나만의 문장을 길어 올려 한 편의 글로 완성하는 과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지적 훈련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12년의 교육 과정 내내 이 '쓰기의 의무'가 멈추지 않고 흘러야 한다.


단순한 줄거리 요약은 의미가 없다.

텍스트를 머릿속에서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며 '나만의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능동적 작업이어야 한다.

"왜 인물은 이 지점에서 절망했는가?", "이 문장이 지금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묻고 답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아이들의 뇌에는 비로소 비판적 사고의 회로가 깔리게 된다.

이런 훈련이 된 아이는 결코 선동적인 영상 하나에 자기 영혼을 팔지 않는다.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장악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어떤 거대한 거짓 앞에서도 당당히 "왜?"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는 지금의 '국어' 교육이 완전히 '문학'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딱딱한 문법을 암기하고 문장 성분을 분석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언어의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에 담긴 '생명'이다. 국어 시간은 아이들이 문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다각적이고 통합적인 사유를 실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문학은 세상이 흑백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통을 짊어진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70년대생이 골목에서 배웠던 그 배려와 연대의 감각을, 지금의 아이들은 문학이라는 숲에서 배워야 한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선언'을 돕는 과정이어야 한다. 말은 정보가 아니라 책임이며, 기억 없는 말은 죽은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죽은 말의 바다에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우리는 다시 그들의 손에 묵직한 책 한 권을 쥐여줘야 한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여 자신의 언어로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길러내는 것, 그것만이 지금의 기형적인 지적 생태계를 바로잡을 유일한 길이다.


12살의 내가 《파우스트》에서 만났던 그 거대한 우주를 지금의 아이들도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한 개인의 성장을 넘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상한 논리'에 무너지지 않게 할 가장 확실한 보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