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성찰을 지운 태도적 허식
우리는 최근 인터넷 세상에서 '메타(Meta)'라는 단어를 공기처럼 마주하고 있다. 유튜브를 켜면 '메타인지'를 길러야 성공한다는 영상이 쏟아지고, 뉴스를 보면 '메타버스'가 미래라고 떠들썩하다. 바야흐로 '메타의 홍수' 시대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불과 20~30년 전인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이 '메타'라는 단어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구글 엔그램 뷰어(Google Ngram Viewer)를 통해 지난 30년간의 텍스트를 분석해 보면, 'Meta'라는 단어의 단독 사용 빈도는 1990년대까지 바닥을 기는 수준(Flat line)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당시에 번역된 수많은 인문·철학 서적에서도 '메타'라는 접두어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번역가들은 그 낯선 외래어 대신 '자기 성찰(省察)', '반성', '초월적 사고'라는, 묵직하고 인간적인 단어들을 선택해 우리 앞에 내놓았다. 우리는 그 단어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았고, 삶을 반성했다.
그러나 2021년을 기점으로 이 그래프는 기형적으로 폭등한다. 페이스북이 사명을 '메타'로 바꾸고, 디지털 유행이 시작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점과 미디어,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메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쓰던 '성찰'이라는 단어의 총량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메타인지', '메타사유' 같은 단어들이 잠식해 들어왔다.
나는 이 데이터의 변화에서 지성의 진보가 아닌, '태도적인 허식(虛飾)'의 급증을 본다.
디지털 세상에서 '있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언어를 잠식했다. '자기 성찰'이라고 말하면 왠지 고통스럽고 구식처럼 느껴지지만, '메타인지'라고 말하면 마치 뇌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신기술을 장착한 듯한 지적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유의 깊이를 담기 위한 언어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이미지를 포장하려는 '디지털 화장술'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언어의 교체가 윤리적 책임의 회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성찰'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고,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도덕적 선언이다. 반면 유행처럼 번진 '메타인지'는 실패를 단순히 '인지 기술의 오류'나 '스킬 부족'으로 격하시킨다. 사람들은 이제 "나는 성찰이 부족한 사람이야"라고 부끄러워하는 대신, "나는 메타인지 능력을 길러야 해"라고 말하며 기술적 솔루션을 찾는다. 고뇌가 사라진 자리에 기술이 들어선 것이다.
진정한 앎은 화려한 접두어에 있지 않다. '문제는 바깥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직시하는 고통을 감당하는 것.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세련된 '메타'라는 라벨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정직한 '성찰의 거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허영으로 가득 찰 때, 우리의 정신 또한 공허해진다.
이제 거품 낀 '메타'의 가면을 벗고, 다시 정직한 '나'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