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박제된 과거, 부정당한 현재
한 배우가 은퇴를 선언했다. 스크린 속에서 누구보다 정의로운 형사였던 그는, 과거라는 족쇄에 묶여 무대 뒤로 사라졌다. 대중은 그가 무명 시절부터 쌓아 올린 땀과 노력, 그리고 연기에 대한 진심을 '위선'이라 부르며 폐기 처분했다.
나는 이 현상을 보며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인간은 고정된 '고체'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체'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의 시간을 '선(Line)'으로 보지 않고, 과거의 잘못된 '점(Dot)' 하나로 그 사람의 전체 좌표를 고정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율법의 고체성 vs 은혜의 유동성
성경 요한복음 8장에는 이와 유사한 서늘한 풍경이 등장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온 군중들은 손에 돌을 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간은 '변하지 않는 죄인'이라는 딱딱한 고체였다. 율법은 과거를 근거로 현재를 심판하고 미래를 삭제하는 가장 강력한 '고정 장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땅에 글을 쓰시며 침묵하신 뒤, 단 한마디로 그 견고한 단죄의 벽을 무너뜨렸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선언은 심판의 대상을 '여인(타인)'에서 '군중(자신)'으로 180도 돌려버린 사건이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깨달았다. 나 또한 과거에 무수히 많은 실수와 죄를 저질렀음을. 결국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씩 흩어졌다. 돌을 내려놓았다는 것, 그것은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며, 그녀 또한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거룩한 포기였다.
회개(Metanoia): 영혼의 상태 변화
나는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의 핵심인 '회개'와 '거듭남'을 '상태 변화(Phase Transition)'로 이해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가 가해지면 얼음(고체)은 물(액체)이 되고, 다시 수증기(기체)가 된다. 본질은 그대로지만, 그 성질과 자유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도 바울을 보라. 그는 과거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살인자였다. 만약 초대 교회가 그의 '과거'만 보고 그를 매장했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다메섹의 빛'이라는 에너지를 투입했고, 그는 '핍박자 사울'에서 '사도 바울'로 상태 변화를 일으켰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함이다. 복음은 인간을 과거에 가둬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든다.
나 또한 도둑이었다
나 역시 고백하건대, 흠결 없는 사람이 아니다. 90년대 그 시절, 교실은 필통과 책 들이 쉬는 시간이면 날아다니고 종종 의자와 책상이 들려졌다 떨궈지기도 했다. 나 또한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치던 철없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이었다. 그것은 분명한 죄였다. 하지만 만약 세상이 나를 그때의 '도둑'으로만 규정하고 낙인찍었다면, 지금 신학을 하고, 별을 관측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글을 쓰는 '박온유'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의 과거를 덮어주고 변화할 시간을 허락해 준 누군가의 '관용'과 '기다림' 덕분이다.
결론: 사다리를 걷어차지 말라
죄는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치열하게 살아내며 증명해 온 변화의 노력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실수 때문에 현재의 성취와 미래의 가능성까지 모두 압수하는 사회는, 갱생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잔인한 사회다.
우리는 모두 상태 변화 중인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누군가의 과거를 향해 던지려던 그 돌을 잠시 내려놓고, 내 손바닥을 먼저 들여다보자. 우리 중 누구도, 그 돌을 던질 자격은 없다.
오직 변화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