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되지 않기 위해 벗다

상업의 파도 속에서 예술을 예술로 남게 하는 마지막 질문

by 박온유

노랑 — 가시화되는 몸, 소비 가능한 이미지


노랑은 드러남의 색이다.
밝고, 선명하고, 쉽게 눈에 들어온다.
노랑 속의 몸은 발견되기 쉽고, 설명되기 쉽고, 소비되기 쉽다.


이곳에서 예술은 종종 환영받는다.
보여질 준비가 되어 있고, 접근 가능하며, 긍정적인 감정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시화는 언제나 중립적이지 않다.


보여진다는 것은 동시에 평가된다는 뜻이다.


노랑의 영역에서 예술은 질문받는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얼마나 안전한가에 대해 묻는다.
이 질문들은 예술을 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경계선을 긋는 질문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여기서부터는 불편하다는 식의 선별이다.

노랑은 가능성의 색이지만, 동시에 조건의 색이다.


예술은 이 영역에서 끊임없이 길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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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 욕망과 충돌, 소비와 저항의 경계


빨강은 충돌의 색이다.
욕망과 불안, 끌림과 거부가 동시에 발생한다.
빨강 속의 몸은 즉각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래서 위험해진다.


상업은 빨강을 좋아하지만, 끝까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욕망은 필요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욕망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더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더 무뎌질 것인가에 대해 선택하라는 압박이다.

빨강의 영역에서 예술은 자주 오독된다.
과하다고 불리고, 불필요하다고 불리며, 지나치다고 불린다.
그러나 이 과잉 속에서 예술은 가장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안전하지 않다고, 나는 계산되지 않았다고, 나는 쉽게 소비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빨강은 예술이 스스로를 검열하기 직전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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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 거부와 침묵, 끝까지 남는 질문


블랙은 가장 많이 오해되는 색이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블랙 속의 몸은 설명을 거부한다.
노출되지만 드러나지 않고, 보여지지만 파악되지 않는다.

상업은 블랙을 불편해한다.


측정할 수 없고, 즉각적인 반응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랙은 종종 밀려난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팔기 어렵다는 이유로, 전략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외된다.

그러나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남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질문한다.


블랙은 예술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영역이다.


여기서 예술은 타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이상 양보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블랙은 예술의 마지막 자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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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은 구조이고, 예술은 태도다


상업은 시스템이다.
피할 수 없는 구조이며, 예술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조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이 되는 순간, 예술은 자신의 언어를 상실한다.


정치적인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태도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무엇을 끝까지 말하지 않기를 거부하는가의 문제다.


예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미 선택하고 있다.

예술이 상업 속에서 정치적이 되는 순간은 단 하나다.
자기 검열을 거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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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반응을 얻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남기기 위해 존재한다.
이해되지 않아도 남고, 소비되지 않아도 남고, 설명되지 않아도 남는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예술은 가장 먼저 침묵한다.


그래서 예술은 끝까지 묻는다.


이 작업은 팔리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예술은 어떤 파도 속에서도 예술로 남는다.




사진은 모두 저이며 사진작가 박순경 님의 작품전에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무단 사용은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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