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톨스토이의 문장을 다시 읽으며

by 박온유



우울이 깊어질 때는 철학자의 말이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숨을 막히게 할 때가 있다.

톨스토이의 이 문장이 그랬다.


“시시각각 죽음을 인식한 삶은 신의 경지에 가깝다.”


이 문장은 맑을 때 읽으면 삶을 더 단단하게 붙들라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독한 우울과 외로움 속에서는 이 말이 철학이 아니라
너무 정직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후반부에 깊은 고독과 실존적 불안을 겪었다.
그에게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 이루어진 사색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끝내 피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어디까지나 삶의 한가운데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더 높은 도덕적, 영적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적 성공이나 사회적 역할을 넘어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묻기 위해 죽음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인식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톨스토이가 살던 시대는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그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더 깊은 고독 속에서 붙들어야 했다.

그에게 죽음을 인식하는 일은 삶을 가볍게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 엄격하게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우울증의 한가운데에 있는 나에게 이 고독한 철학은
삶을 단단하게 붙드는 말로 다가오기보다 때로는 내려놓고 싶게 만드는 말로 다가온다.

같은 문장인데,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도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다.
주인공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죽음은 공포이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비추는 빛이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죽음이 언제나 삶을 구원하는 계기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상태에서는 이런 성찰이 삶을 붙들어 주지만,
어떤 날에는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충동으로 미끄러지게 만들기도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 역시 인간이 죽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톨스토이의 사유는 이런 생각들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실존적 고독은 자유보다는 무기력으로,
선택보다는 정지 상태로 더 자주 다가온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말이 삶을 더 잘 살라는 요청이 아니라
삶을 너무 쉽게 내려놓게 만드는 위험한 정직함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톨스토이에게 죽음은 신의 경지에 다가가는 과정의 일부였다.
기독교적 구원과 연결된 영적 성장의 통로였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실체로 바라보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선은 나에게 죽음을 특별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평범하고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가 어느 순간부터는 삶의 의미를 찾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죽음을 간절히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까지 쓸려가 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시시각각 죽음을 인식하라”는 말은
신의 경지에 이르는 문장이 아니라, 너무 오래 혼자 버텨온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야 할 질문처럼 남아 있다.


이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죽음을 생각한다는 일이 언제나 삶을 향한 성찰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 역시 인간 경험의 일부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