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갯말에 대하여
사람을 사랑하는 울보.
사람이 사랑이라 읽히게 될 날을 기다리는 바보.
사랑하여 글을 쓰고 노래를 짓는, 철들기 싫은 노래쟁이.
이 문장은 내가 나를 소개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은 변명에 가깝다.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왜 아직도 이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에 대한.
나는 감정을 빨리 느끼는 사람이다.
기쁜 것도, 아픈 것도 남들보다 먼저 와서 남들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울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울음은 약해서라기보다 차단하는 법을 끝내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줄이고 관계를 관리 가능한 거리로 유지하는 걸
성숙이라고 부른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고,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으니까.
나는 그 공식을 이해한다.
이해하지만 따르지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나로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순간들,
관계가 효율이나 역할로만 정리되는 순간들 속에서 끝까지 사람을 사랑으로 읽고 싶었다.
그건 희망이라기보다 고집에 가까웠다.
그래서 바보가 되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날을 기다리는 사람,
사람이라는 단어가 다시 사랑으로 발음될 날을 혼자서라도 믿는 사람.
사랑이 생기면 나는 그걸 마음속에만 두지 못한다.
감정이 너무 커져서 언어로 옮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노래를 짓는다.
표현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사랑을 살려두기 위해서.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방식에 가깝다.
말로, 문장으로, 리듬으로 옮기지 않으면 사랑은 금방 닳아버리고
나는 조금씩 식어버린다.
사람들은 그걸 철없다고 부른다.
이제 그만 현실을 보라고, 조금 덜 느끼고, 조금 덜 믿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철이 들면 내가 가장 먼저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철들기 싫은 노래쟁이로 남기로 했다.
울보여도 좋고, 바보여도 괜찮다.
사랑 때문에 쓰는 글이라면 끝까지 쓰고 싶다.
죽음 앞에 서는 순간까지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는다면
이 말이면 충분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그 사랑 때문에
끝내 글을 놓지 못한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