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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29. 2024

밀라노에서 30년차, 그 시작은 야채시장이었다!

"밀라노에사는사람들" 두번째 인터뷰, 손끝으로 삶을 전하는 심난영작가님

오랜만에 이른 아침부터 밀라노 시내에 있는 스타벅스 리저브를 찾았다.

밀라노 코르두시오(cordusio)에 위치한 스타벅스 리저브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로스팅 기계가 있다. 여기서 로스팅되어 포장된 커피는 유럽 각 지역의 스타벅스 매장으로 배송된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얼음이 동동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통 콜라찌오네(colazione, 카푸치노와 같은 커피와 브리오쉬 등을 먹는 간단한 아침식사), 아페리티보(aperitivo, 저녁식사 전에 식욕울 돋우기 위해 와인이나 칵테일과 함께 간단한 간식을 먹는 식전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로 붐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객들의 성지가 된 이곳에서는 다양한 텀블러와 커피잔, 티셔츠와 에코백 등의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사실 밀라노에 사는 사람들은 평소에는 이곳에 잘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커피 한잔을 주문하려면 길게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20분 넘게 기다렸다가 주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길거리에 100미터마다 있는 바(Bar)에서 마시는 카푸치노와 브리오쉬는 어딜 가나 맛있기 때문에 굳이 시내에 있는 스타벅스까지 갈 필요를 못 느낀다.

내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특별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바로 '밀라노에 사는 사람들' 시리즈의 두 번째 인터뷰이, 심난영 작가님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인스타그램으로, 우리 가족이 아직 뉴델리에 살던 때였다. 뉴델리도 밀라노도 코로나 펜데믹의 여파로 일상생활이 완전히 무너졌던 시기였다. 당시에 나는 글을 쓰고 작가가 되어 조금씩 세상으로 한 발짝 나오던 시기였고, 심난영 작가님 역시 전업주부 20년 만에 붓을 다시 들기 시작해 세상으로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가족이 갑작스럽게 밀라노행을 결정했을 때 미지의 밀라노에 대해 물어본 분이 바로 작가님이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타벅스에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분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미리 적어두었던 질문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이번에는 수첩에 기록을 하는 대신 작가님의 음성을 직접 녹음하기로 했다. 핸드폰 충전상태를 한번 더 확인하고, 음성녹음 버튼을 눌러 테스트해 보았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니에요, 작가님. 어서 오세요."

"산 바빌라 역에서부터 걸어왔어요."

"오모나, 거기서 여기까지 3 정거장이나 되는데 걸어오셨다고요?"

"제가 걷는 걸 좋아해서요. 금방 왔어요."

"와.... 그래서 이렇게 날씬하시구나...."


나는 서둘러 작가님을 테이블에 앉힌 후 길게 늘어선 줄 맨 끝으로 가서 섰다. 앞쪽에서 주문하고 있는 어느 여행객과 매장 직원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러려니.... 하며 한참을 기다린다. 이런 기다림이 익숙해진 지금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며 카푸치노와 디저트를 주문해 들고 작가님 앞에 앉았다.


심난영 작가님

선량 : 작가님, 제가 처음 밀라노 왔을 때 작가님께서 제게 직접 만든 티라미수를 주셨어요. 기억나세요? 그때 저희가 숙소에 살던 때였어요.


난영 : 어머? 그랬나요? 네. 그때 만난 던 기억이 나네요.


선량 :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고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못 하고 어리바리하던 때였거든요. 정말 감사했어요.


난영: 아휴, 아닙니다.


선량 : 저도 벌써 3년 차가 되었어요. 그런데 작가님은 30년이 되셨다고요? 와....


난영 : 네. 어느새 30년이 되었네요.


선량 : 처음엔 어떻게 밀라노에 오시게 된 거예요?


난영 : 저희는 대학교에서 CC였어요. 남편은 공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저는 도예를 전공했지요. 사실 처음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친구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왔다가 로마에서 길거리 야채 시장에 간 거예요. 그 야채시장에 반해서 갑자기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나라를 바꿨어요.


선량 : 네? 야채시장에 반해서 이탈리아로 오셨다고요?


난영 : 네. 야채시장에서 파는 오렌지 있죠. 겉은 주황색에 속은 빨간 그 빛깔의 오렌지가 너무 맛있었대요. 그리고 그 시장에서 느낀 활력? 그런 게 너무 멋있었대요. 그래서 밀라노로 오게 되었어요. 밀라노에 와서 이탈리아어도 처음 배웠어요.


선량 : 그때가 언제였나요?


난영 : 그때가.... 1993년이었어요.


선량 : 어머 제가.... 중학생 때였네요.


난영 : 그러니까....  지금 제 딸 나이 때 밀라노에 처음 온 거예요. 저는 도예를 전공했고 밀라노에 와서는 조각을 배웠어요.


선량 : 처음에 밀라노 왔을 때 어떠셨어요?


난영 : 처음엔 부모님들이 걱정이 많으셨어요. 쌀 사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 하셨죠. 당시에 한국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낙후된 나라 이미지였거든요. 걱정들을 많이 하셨어요.


선량 : 당시에는 한국이 조금 더 잘 살았었나요?


난영 : 환율이 한국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화폐가 '리라'였는데요, 한국 돈으로 10만 원이면 여기서는 20만 원 정도로 유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선량 : 여기 오래 사신 분들이 다들 그 시절이 좋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난영 : 맞아요. 그때가 좋았지요. 그때 다른 사람들은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많이 가져왔는데 저희들은 저희 남편이 일본에서 사 온 엄청 큰 스테레오와 시디를 들고 왔어요.


선량 : 아니 왜 그걸 들고 오셨어요?


난영 : 음악이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걸 들고 왔어요.


선량 : 넘 낭만적이셨군요. 여기도 음악이 넘치는데 말이죠....


난영 : 네. 처음에는 아이들 없이 저희 둘이었기 때문에 다 좋았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관공서가 너무 느리고 절차가 복잡해서 힘들다고들 했지만, 저희는 그런 게 크게 화가 나거나 힘들진 않았던 것 같아요.


선량 : 이탈리아의 문화에 잘 스며드셨던 걸까요?


난영 : 저희는 주위에 좋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파엔자(Faenza)라는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가 있어요. 거기서 2년 정도 학교를 다녔어요. 그리고 다시 밀라노로 와서 브레라(Brera) 예술대학원에서 조각을 다시 배웠어요.


선량 : 와... 능력자셨군요.



난영 : 그런데 저는 브레라를 졸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학교를 입학하고 연장한 이유는 뭔가가를 더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탈리아에 체류할 수 있는 체류 허가증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는데 임신을 한 거예요. 우리 첫째 아이를 가진 거죠.


선량 : 어머, 세상에나.


난영 : 그래서 저는 첫째 아이랑 같이 학교를 다녔죠. 유모차 끌고 다니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선량 :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아이를 데리고 유모차를 끌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니요.


난영 : 근데... 아이가 울지 않고 잘 있었어요. 그리고 아기가 뱃속에 있었을 때 초반에 교양과목 같은 과목을 일찍 끝내버렸어요. 그리고 나중에 실기를 했죠.


선량 :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이네요. 그런 환경이 가능했다는 것도 놀랍고요.


난영 : 그때 저는 정말 욕심이 많았고, 작업 방향성에 대해 교수님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는 시간들이어서 아이가 있다는 게 작업에 방해 요소는 아니었어요. 그때는 정마  열심히 작업하며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갈림길에 봉착했어요. 제가 하던 작업 (설치 미술)이 이태리 보다 미국이나 독일 쪽으로 활동 영역을 옮기라는 조언과 권유를 받으며 고민에 빠졌죠. 


그때 내가 가정을 선택할 것인가, 내 앞날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시점이 다가왔어요. 왜냐하면 가정을 선택하지 않고 내 꿈을 위해 미국이나 독일로 떠난다면 내 가정이 온전해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가정을 선택하고 밀라노에 머물면서 서서히 작업을 중단하게 되었죠.


선량 : 그게 첫째 난 이후였나요?


난영 : 둘째까지 난 후였어요. 둘째 낳고도 정말 열심히 작업을 했었는데요, 가정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딱 먹은 순간부터 작업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선량 : 어머, 그게 가능하셨어요?


난영 : 성경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낳은 첫째 아이를 살려달라고 몇 날며칠 울며 기도하다가 안 될 걸 인정한 후로는 딱 눈물을 멈추고 뒤돌아섰던 것처럼 저도 그랬어요. 내 꿈을 향해 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딱 멈추더라고요....


선량 : 많은 엄마들의 삶이 작가님의 삶에 농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나의 꿈을 좇으면 가정을 잃게 될 거라는 그 불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꿈을 향해 가고 싶은 열망. 그 사이에서 얼마나 고뇌가 많았을까요?

그럼에도 결심을 하시고 가정을 선택하셨군요. 그리고 20년 동안 예술가가 아닌 엄마와 주부로 사셨단 말이죠. 지금은 이렇게 뒤돌아보며 담담히 말씀하실 수 있지만 당시엔 심정이 어떠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저는 사실 남편을 많이 원망했었거든요. 물론 지금은 전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어요. ㅎㅎㅎㅎ


그렇게 20년 동안 엄마와 주부로 사시다가 다시 붓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작년에는 직접 그리신 그림으로 전시회까지 하셨는데요, 그 이야기도 정말 궁금해요.


20년 만에 붓을 들도 아마존 박스에 그리기 시작한 작가님의 작품


다음 2편에서는 심난영 작가님이 다시 꿈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과 작품,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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