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이중생활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은 일하러 가기 싫은 어른의 마음과 매한가지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있어도, 재미있는 수업 시간이 있어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학교에 가는 일은 지겨울 법 하다.
나도 중학교 때 학교에 가기 싫었다. 아침마다 배가 아프고 설사를 자주 했었는데 그때부터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 "학교 가기 싫어."라는 아이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라며 아이들을 재촉한다.
하지만 하교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등교 때와는 사뭇 다르다. 내 얼굴이 보이면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 손을 흔들며 교문을 나선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한다.
"별일 없었어?"
이제부터 아이들의 수다타임이 시작된다.
우리 두 아이는 꽤 내성적이다. 반에서 가장 조용하고 얌전하기로 유명하다. 수업시간에도 허튼짓을 거의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를 나서는 순간, 두 아이는 다른 인격의 존재가 된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영어로만 말하는 아이들이 엄마를 만나면 한국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 두 아이가 양쪽에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누구의 말에 집중해야 할지 순간 갈피를 잃는다. 그때 큰아이, 지안이의 말에 집중하느라 둘째 아이, 소은이의 말을 놓치면 아이는 삐지고 만다.
"엄마, 내 말 듣고 있어? 엄마, 내 말 안 들었지?"
"미안, 미안. 오빠 말 듣느라고. 뭐라고 했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일어난 일, 선생님이 했던 말, 친구들이 했던 행동들을 모두 말해준다. 점심때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 급식 시간에 누굴 만났는지, 친구와 무얼 하고 놀았는지, 영어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까지도 말해준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말하고 듣느라 우리의 하교 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둘째 딸아이는 집에 가는 내내 걸그룹 노래를 흥얼거리고, 집에서 춤을 춘다. 학교에서는 절대 나대지 않는 아이가 나를 만나는 순간 무장해재 되는 것이다.
그런 아이가 조금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엄마의 옆자리가 아직은 많이 편하다는 증거이니 안심이 된다. 나중에 조금 더 자라면 내성적인 면과 활발한 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아이의 성향과 인격을 만들어 갈 것이라 믿는다.
중학생인 큰 아이는 며칠 후에 있을 생애 첫 무도회(Ball party)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트너가 있어야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는지, 누가 참석하고 누가 참석을 안 하는지, 누가 누구에게 고백을 했고 또 누가 거절을 했는지 등등 재미난 가십거리가 가득하다.
그 와중에 우리 아이는 진작에 파트너가 정해졌다. 작년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주며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델핀이 이번에도 먼저 "나랑 파트너 할래?"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어?"
"of course, yes.라고 했는데...."
"야, of course는 빼박이지. 그냥 Yes만 했어야지. 아니, 그리고 여자애가 먼저 말하게 하는 게 어딨어? 네가 먼저 말했어야지."
"파트너 있는 게 어디야. 없는 얘들이 더 많아."
"그래서, 네 친구는? 누구랑 간데?"
"모르겠어. 아니 파트너가 정해졌는데 다른 애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버렸다니까."
"아, 뭐야.... 막장이야? 그럼 파트너가 상처받을 건데."
"자기 마음 가는 데로 하겠대."
"와, 진짜 재밌다......."
이제 갓 초등학생 티를 벗은 아이들의 밀고 당기는 플러팅을 훔쳐보며 40대 아줌마는 괜히 마음이 설렌다.....
지난주, 큰아이와 같은 학년인 여자 아이인 엠마의 엄마를 만났다.
엠마는 성격도 좋고, 얼굴도 예뻐서 인기가 꽤 많은 아이이다. 이미 두 명의 남학생으로부터 파트너 신청을 받았다고 지안이가 말해주었다.
그 소식을 엠마 엄마에게 전해주니,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엠마는 엄마에게 그런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준다고 한다. 엠마가 학교에서 인기가 꽤 좋다는 말을 해주니, 내심 좋아하며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되물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학교생활에 대해 잘 말해주지 않는 아이를 둔 엄마들이 지안이에게 "요즘 학교에서 별일 없느냐?"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지안이는 학교에서 듣고, 보고, 관찰한 것들을 하나하나 말해준다.
사회에서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사람이 더 인정받는다. 발표도 적극적으로 하고, 말도 잘하는 아이가 선생님의 주목을 받기 쉽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의 성향과 상관없이 내 아이가 조금 더 적극적이길 바란다. 앞에서 주도하는 리더 격의 아이들을 칭찬하고 부러워한다. 반면 뒤에서 소심하게 앉아있는 내 아이를 보며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향엔 모두 장단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가진 고유한 성향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앞장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저절로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는 걸 안다.
내 아이들은 영어 시간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 인도에서 3년을 살고 온 덕분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영어를 좀 잘하는 편에 속한다. 그렇다 보니 영어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들었고, 친구들로부터 "영어 잘하는 아이"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영어에 꽤나 자신감이 생겼고, 그 시간엔 시키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다.
아이들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내 아이의 모습이 꽤 고맙다.
학교에서는 말도 별로 없고, 내성적이지만 집에 와서는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주고,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니 말이다. 아이들의 사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편안한 장소인 집에서 가장 편안한 상대인 엄마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아이들에게 숨 쉴 구멍이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