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여름이 그리워질 때
시에나 여행 중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다름 아닌 발 도르차(Val d'Orcia)였다.
발 도르차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역사적인 배경으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4, 15세기에 계획적으로 농경지를 계간 한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의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는 여러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세상을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분명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게 분명했다.
발 도르차에 관한 정보는 여러 사람의 sns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밀밭이 바람에 흩날리며 초록파도를 만드는 정경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냈다. 밀밭 사이에 서서 가족사진을 찍으면 평생토록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초록 밀밭 사이로 원뿔모양을 하고 직선으로 높고 곧게 자란 사이프러스 나무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밀라노에서 3년을 살고, 한국으로 돌아간 지인 한 명은 해마다 이곳을 찾아 똑같은 옷을 입고 가족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오래도록 발 도르차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여행을 간 날이 8월 중순이라서 날이 너무 더워 가족들이 지쳐있었지만, 이번 시에나 여행의 말미를 아름답게 장식하리라 다짐하며 무작정 "Val d'orcia'를 구글지도에 찍고 달리기 시작했다.
8월의 이탈리아는 건기이다. 햇살이 강하고 건조하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비가 오지 않는다. 습하지 않아서 그나마 참을만한 더위였지만, 가는 곳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발 도르차로 가는 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먼지로 뒤집어쓴 모습을 보며 우리 차도 과히 다르지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멋진 밀밭에 대한 기대는 놓지 않았다. 아이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아이브와 뉴진스, 투바투의 노래를 연달아 틀어주었다. 이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렌지카라멜의 "카탈레나" 노래도 틀었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구글맵이 가리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뭔가 구글링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Val d'orcia를 검색했다. 조금만 더 가면 진짜 발 도르차가 나올 것 같았다. 우리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달렸다.
한참을 달리니, 길가에 주차된 여러 대의 차량이 보였다. 모두 먼지를 뒤집어쓴 모양새였다. 그리고 한국사람으로 보이는 동양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긴가 봐!!"
우리는 그들을 따라 차를 한편에 주차를 하고 그 사람들을 따라 옆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 걸었다.
넓게 펼쳐진 평야가 나왔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푸른 바다를 이뤄야 할 밀밭은 이미 추수가 끝났는지, 빡빡 민 머리에 이제 막 자라난 머리카락처럼 황망한 갈색밭에 초록 새싹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푸른 밀밭 사이를 가르며 파도를 일으켜야 할 바람이 우리에게로 불어와 모자를 날렸다.
"악! 엄마 내 모자 날아간다~"
"엄마, 이게 뭐야? 우리 뭘 보러 온 거야?"
추수기간이 여름이라니....
잔뜩 부풀어 올랐던 기대는 뻥~ 터지고 말았다. 그 기대와 함께 딸아이의 코피도 뻥 터졌다.
나는 가방을 뒤져 휴지를 찾아 딸아이에게 건넸다. 코를 틀어막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딸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보자. 검색해 보니까 저 앞에 글래디에이터 영화 촬영지였던 곳이 있대."
이 말에도 아이들은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뒤로 한채 혼자 열심히 걸었다. 그 길의 끝에 작은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결혼식을 했는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친구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 여름에, 이 황량한 곳에서 결혼식이라니....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이제 막 결혼을 한 커플답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교회 앞에 주차되어 있던 차를 타고 먼지를 가르며 어딘가로 떠났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숙소로 돌아가자!"
잔뜩 기대했던 풍경을 보지도 못했고, 평생 간직할 가족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연인과의 데이트에 바람맞은 사람처럼 아쉬운 마음을 붙들고 숙소로 향했다. 무엇보다도 사이프러스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웠다.
더운 날씨에 걸어 다니느라 피곤했는지 아이들은 차에서 잠이 들었다. 나와 남편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향했다.
"숙소 근처에 사이프러스 길이 보이던데, 아쉬운데 거기라도 가볼까?"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남편이 말했다.
"그래, 그러자."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 차를 댔다. 뜨거웠던 한낯의 공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까지 물어오니, 8월의 더위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이미 추수가 끝난 밀밭엔 동그랗게 말린 곤포가 널려 있었다. 순간,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서 "마시멜로처럼 생긴 저건 뭐야?"라고 혜원이가 은섭이에게 물었던 게 떠올라 마음이 한순간에 말랑말랑해졌다.
"엄마, 저기로 올라가 보자."
덥다고 짜증을 부리던 아이들은 사라지고, 성큼성큼 밀밭 언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언덕 끝에 올라 하늘을 보며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엄마, 너~~ 무 멋있어!!"
"여기 서봐. 사진이 진짜 잘 나와."
"우리 저기도 가보자! 저기 나무, 저게 사이프러스지?"
"와, 진짜 멋지다!"
기대했던 게 무너져 실망으로 가득 찼던 우리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우리의 여행이 어쩜 이렇게 우리의 삶과 닮아있는지....
처음 밀라노에 왔을 때 우리는 과연 1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회사 사정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밀라노는 생각보다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와버린 우리를 탓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앞뒤 생각을 하지 않는지, 어째서 이렇게 저질러보고 마는지....
하지만 밀라노 3년 차가 된 지금, 우리는 안다.
지금 당장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한 시간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그게 인생이고, 그것이 바로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그러니, 현재의 일 때문에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