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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나를 위해 도시락을 싸다.

소풍 가서 얻은 충만한 마음

by 선량

다른 엄마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저를 위해 요리를 한다거나, 도시락을 싼 적이 거의 없어요. 매일 아침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요리를 하는 것이 제 본업이고, 임무이고 루틴이죠.


아이들은 자주 밥을 남깁니다. 전 그게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자주 내 밥을 따로 놓지 않고 기다렸다가 아이들이 남긴 밥을 먹습니다.

웬 청승이냐고요?

해외에서는 한국 쌀과 식품을 구하기 힘들다 보니, 버리는 게 너무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버릇이 됐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남은 밥 엄마 먹으라고 대놓고 말할 때는 조금 서글퍼요. 내가 내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더니, 아이들도 날 남긴 밥으로 여기는구나.....

그래서 다시는 남은 밥 먹지 말자 다짐했어요. 그런데 또 먹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밥을 조금 준다고 주는데도, 매번 양 조절에 실패합니다.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요. 집 밖에는 밥도 못 먹는 아이들이 수두룩 한데 말이죠.



나보다 8살 많은 제 큰언니는, 혼자 점심을 먹을 때 거나하게 차려 먹어요. 혼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가끔 혼자 소고기도 구워 먹어요. 혼자서도 요리를 맛있게 해서 예쁜 그릇에 담아 먹어요. 전 그게 이상해 보였어요. 전 혼자 집에서 점심을 먹어야 할 때면 아무것도 하기가 싫거든요. 정말 허기만 때울 정도로 대충 먹어요. 그중에 라면은 가장 손쉬운 음식이죠.


나이 들수록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가족을 더 챙기고 사랑하게 되잖아요. 정작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힘들어지기도 하죠.

그렇게 퍼주기만 하다가 어느새 내 사랑의 양동이는 바닥이 드러나고, 갑자기 허무해지고, 내가 퍼 준 사랑은 다 어디 갔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보다 팔 년 먼저 마흔을 지내본 큰언니의 혼삼(혼자 삼겹살)은 진리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 가족들에게 사랑을 다 퍼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사랑해 주는 것.

내 사랑의 양동이가 남아 있어야 가족들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는 것.



저도 절 위해 도시락을 쌌어요.

비록 샌드위치에 과일이었지만,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내 시간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주방은 난리가 났어요. 아침 먹은 그릇, 남편 도시락 준비한 흔적들이 너저분하게 남아있었죠.

모른 척하고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가버렸습니다.


인도에도 가을이 왔어요.

여전히 반팔을 입어야 하고, 에어컨을 한 번씩 틀어야 하지만, 뜨거움의 강도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가을 소풍을 떠났어요.


부겐벨리아

부겐벨리아 가든이에요. 이 꽃은 사계절 내내 피어있는 꽃입니다.

오솔길이 너무 좋아요.


나이 들수록 자연과 오솔길, 그리고 마음 맞는 친구 한 명과의 대화가 참 소중합니다.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 샌드위치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어요. 여태 그걸 몰랐습니다. 지금껏 남이 해준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말하고 다녔죠. 내가 내 음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아이들한테 음식 남긴다고 타박을 주었었네요.

나부터 내 결과물을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을요.


서른아홉인 친구는 곧 마흔이 됩니다.

치열하게 워킹맘으로 살다 휴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와서 잠시의 휴식시간을 갖고 있어요. 이 시간이 너무 귀하고 좋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는 그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느라 에너지가 소비되어 이젠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마흔을 앞둔 그녀에게.

먼저 마흔을 경험해 본 제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국 돌아가고 서로의 길로 떠나고 나면 그중에 남는 사람 몇 안돼요. 그냥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걸 하세요. 마음의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야 에너지가 충전되죠.”


말하고 보니, 바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네요.

남이 아닌 내 마음을 먼저 돌아보는 것.

나를 위해 하루를 보내는 것.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

그게 바로 나를 사랑하는 길이었네요.


지금, 잘 걸어가고 있는 거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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