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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01. 2020

설거지학 개론

당신도 골방에서 혼자 쓰나요

본인에게 맡겨진 업무 중에 좋아하는 일이 있는 반면 하기 싫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학생에게 좋아하는 과목이 있고 싫어하는 과목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호불호는 가정 업무에도 존재한다.


여러 집안일 중에서도 특히 하기 싫은 일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림질이나 옷 정리하는 일이라고 하던데 나는 설거지를 가장 싫어한다.

이상하게도 설거지는 하고 또 해도 끝나지가 않는다. 티는 안 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요리를 할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게 된다. 어떻게 하면 설거지를 조금 더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하기 싫은 마음을 잠깐 접어 놓고 설거지에 대해 파헤쳐 보자.



1. 설거지의 정의

설거지란 말 그대로 더러워진 그릇을 씻는 일이다. 그릇이 더러워진 이유는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 요리를 했거나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즐겁게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고 남는 것은 더럽혀진 그릇들이다.

그런데 이 그릇은 정말 더러운 것인가? 맛있고 즐겁게 먹은 음식물의 잔여물일 뿐인데? 먹고 남은 잔여물이 쓰레기가 되는 일은 매우 익숙한 일이지만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적당량을 요리해서 남기지 않고 다 먹으면 좋으련만 꼭 넘치게 요리를 하고 다 먹지 못한다. 양 조절을 하지 못해 넘치도록 요리하고 남은 음식은 매번 반찬통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한다. 냉장고에 한번 들어간 음식은 왜 또다시 먹기가 싫은 지.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고 만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음식물이 잔뜩 남아있는 그릇을 그대로 놔두면 세균의 원상지가 될 것이기에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잘 문지른 다음 깨끗한 물로 씻어 건조대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2. 설거지의 순서 

중학교 2학년 때 가정 교과서에는 설거지, 빨래, 바느질 등의 가사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었다.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이유, 방법, 순서. 빨래 세제의 역할, 비누와 가루비누의 차이, 얼룩에 물리적 힘이 가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손빨래와 세탁기의 차이 등등.

도대체 왜 그런 걸 배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빨래나 설거지를 하면서 이론을 생각하며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중간고사에 설거지에 대한 시험문제가 나왔다. 여러 식기 중에 무엇부터 씻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1. 숟가락  2. 젓가락  3. 컵  4. 밥그릇  5. 국그릇


  할머니가 하시던 행동을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는 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며 밥그릇을 가장 먼저 씻으셨다. 의심하지 않고 4번 밥그릇에 동그라미를 쳤다.


답은 컵이었다.  가장 깨끗한 것부터 더러운 순서로 씻어야 한다고 했다.

‘컵이 정말 가장 깨끗할까? 컵으로 꼭 물만 마시는 것도 아닌데? 컵으로 흙장난을 했다면 그게 가장 더러운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교과서에 나온 것이 정답이고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공부를 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예외사항은 인정되지 않는다. 아웃사이더라는 낙인만 찍힐 뿐.



3. 설거지의 종류

설거지를 할 때 그릇만 씻는 것은 아니다. 숟가락, 젓가락, 포크, 주걱, 뒤집게, 집게, 식칼, 과도 칼, 거름망, 국자……. 부수적으로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 지. 그뿐만이 아니다. 국을 끓인 냄비, 부침개를 부친 프라이팬, 쌀밥을 한 압력밥솥까지. 크고 작은 조리기구도 씻어야 한다.

잔뜩 쌓여 있는 냄비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요리를 할 때부터 냄비를 적게 사용하자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요리를 할 때는 충분한 냄비와 조리기구가 있어야 기분이 좋다. 야채를 썰어야 하는데 칼이 미리 씻겨져 있지 않으면 요리를 하다 말고 칼을 씻어야 한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기분도 좋지 않다. 설거지와 요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기분 좋게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어도 설거지를 꼭 미리 해 놓아야만 한다. 나중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서 지금의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편안한 노후를 위해 젊을 때 땀 흘려 일하는 모습과 참 닮았다.



4. 효율적 설거지의 방법

하기 싫은 설거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드라마를 보면서 하고 있다. 아이들 눈치 보느라 낮 시간 동안 마음껏 보지 못하는 드라마를 설거지할 때는 당당히 틀어 놓는다. 가끔은 설거지를 하면서 글감을 생각하기도 한다. 글을 쓰다 막힌 부분을 다시 생각하기도 하고,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글을 써 볼까 떠올리기도 한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생각한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는다. 남편은 함께 씻고 헹구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불편하다. 혼자서 드라마를 보면서 차근차근 씻고 헹구고 건조대에 놓는 반복적인 행위가 몸은 피곤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편하다.

일을 단시간에 빨리 끝낼 수 있는 효율성보다 오래 걸리더라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개인주의적 환경이 더 좋다.



5. 설거지의 의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에 대한 깊은 사유는 그 행위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위함이다.  

난 지금 설거지에 대한 의미를 찾고 있다.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하는 일. 나중을 위해서 지금 시간을 들이는 일. 가족을 위한 일. 끝내고 나면 깨끗해지는 일.



6. 결론

이제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주방에 가 잔뜩 쌓여 있는 그릇들을 씻어야겠다. 설거지의 의미를 찾았으니 이제 좀 즐겁게 해 봐야겠다.  


즉, 설거지는 남편이 해준다면 가장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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