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삶은 지속된다.
엄마는 말했다. 내가 잘못될까 봐 걱정했었다고. 일부러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고.
어려서부터 사람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온종일 긴장하며 살았다. 나의 정서적 불안은 신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주 소변이 마려웠고 콧물이 나오지 않음에도 코를 훌쩍거렸다. 아침마다 설사를 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곱 형제 중 장남이었던 아빠가 엄마와 결혼해 첫째 딸을 낳았다.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에 다들 기뻐했다. 1년 뒤에 둘째 딸을 낳았다. 눈도 크고 입도 큰 둘째 딸은 인형처럼 사랑스러워 모두가 예뻐했다. 연년생을 키우느라 힘들었던 엄마는 셋째가 들어섰을 때 조용히 병원에 다녀왔다. 그 후로 4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조바심이 생겼다. 이미 아들을 둘이나 낳은 작은 아빠와 비교가 되었다.
‘혹시 세 번째에 왔었던 아이가 아들이지 않았을까? 귀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벌을 받는 것일까?’
엄마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 후 다시 아기를 낳았는데 하필 또 딸이었다. 딸 셋까지는 괜찮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네 번째에 아들을 낳으면 되니까.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고 했으니까.
드디어 넷째가 태어났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컸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한 산모는 지쳐 쓰러졌고, 갓 태어난 핏덩이는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대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아빠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술을 마시러 갔다. 술에 잔뜩 취한 채 선산에 있는 아빠의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왜 나는 아들도 못 난다요. 왜 나만 아들을 못 난다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의 한 맺힌 눈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흘러내렸다.
출생에 대한 아릿한 이야기를 7살 때 처음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아빠의 고모, 그러니까 우리가 노할매라고 불렀던 할머니가 한 번씩 우리 집에 찾아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니가 털을 비싸게 팔아서 니 동생이 아들이랑께. 그랑께 니가 귀한 딸이여.”
노할매가 말 한 비싼 털이 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다섯 번 만에 아들이 태어났다. 어쩌면 아빠의 눈물이 하늘에 닿아 귀한 아들을 점지해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씩 엄마는 그때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셋째 딸과 넷째 딸 그리고 다섯째 아들은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아기였을 때의 내 모습을 모른다. 누구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언니들과 동생에겐 있는 백일 사진과 돌사진이 나에겐 없다. 내가 사진에 등장하는 시기는 동생이 태어난 후부터다.
내가 처음 등장하는 사진 속에는 우리 다섯 형제가 나란히 서 있다. 11살 큰언니는 생후 3개월 즈음 돼 보이는 남동생을 앞을 향해 안고 있고, 10살 둘째 언니와 5살 셋째 언니는 서로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다. 그 옆에 3살 즈음 돼 보이는 아이가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오른손에 들고 잔뜩 늘어난 7세 여아용 팬티를 입은 채 우두커니 서 있다. 볼이 터질 것 같은 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다. 무표정 속의 두 눈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엄마의 난자와 아빠의 정자가 만나기 전부터 불안한 상태였을 테니,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는 불안의 교집합이 아니었을까? 딸이라는 존재 때문에 버려질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날 미워할까 봐 그렇게 눈치 보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어렸을 때의 불안은 어른이 되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교 활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교적으로 변하긴 했다. 나를 배려해주는 엄마의 사랑을 알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언니들과 한 방에서 지내며 끈끈한 동지애도 나누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들은 원래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부모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좋기도 했다. 나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으니 크게 실망할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마음이 불안하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어른이 되었지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난 그게 만족스러웠다.
내 자존감이 여전히 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엄마가 된 이후였다. 난 착한 사람이니까 아이들에게도 착한 엄마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첫째 아이는 나의 불안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아기 때부터 잘 울고, 엄마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낯선 사람을 두려워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을 힘들어했고,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모르는 아이들이 다가오면 후다닥 자리를 비켰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내 속의 어린 자아가 한없이 흔들렸다. 내 아이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함께 보았다.
나의 낮은 자존감은 자주 아이들에게 투영되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한 행동을 하거나, 엄마를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면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는 일은 예삿일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쳤다.
“그만 좀 해. 그만 좀 울어. 제발 좀 자.”
“나 좀 내버려 둬.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넌 왜 그 모양이야?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나한테 제발 오지 마. 저리 가.”
낮은 자존감은 홍 군과의 관계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홍 군의 눈치를 자주 보았다. 그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준 배려만큼 돌려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감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불안은 마음 한구석에 꼭꼭 숨어있다가 한 번씩 화를 일으켰다. 뽑아내고 뽑아내도 다시 살아나는 잡초처럼. 내가 아이에게 쏟아부은 말들은 아이의 가슴에 얼마나 콕콕 박혔을까? 나에게 있던 잡초의 씨앗을 내 아이에게 흩뿌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완전히 잡초를 제거할 수 있을까? 독한 약을 써서 뿌리 뽑아야 할까? 아니면 잡초가 자랄 때마다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내어 불에 태워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기질적 불안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았고, 내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했으니까.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느라 충분히 힘겨운 세월을 살아 냈음을 안다. 엄마가 나에게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 역시 엄마에게 항상 죄송스러우니까.
2012년부터 해외에 사는 나는 병원에 가서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병원에도 갈 수 없었고, 약을 먹을 수도 없었다. 자포자기 한 채로 과거처럼 현재를 살아야 할까? 우울한 감정이 날 잠식하는 것을 내버려 둬야 할까? 아이들은 아이들의 몫이니 알아서 하라고 해야 할까?
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떳떳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더는 내 감정을 불안이라는 잡초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에도 푸른 잔디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예쁜 들꽃이 피고 노란 해바라기가 우뚝 피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에도 봄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냥 바라기만 하고 기다릴 것인지, 스스로 찾아 나설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