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1장.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삶은 지속된다.

by 선량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상대방의 칭찬이나 인정의 말을 들으면 스스로가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의 부탁에 거절하지 못한다. 항상 좋은 얼굴로 사람들과 대화한다. “당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군요.” 이 한마디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가끔 다 자란 딸이 친정 엄마와 싸운 이야기를 들으면 멈칫한다. 어린시절부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 친정 엄마와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와 관계가 워낙 좋아서 라기보다 싸울 일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엄마 역시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하는 성격이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성격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아이들도 나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인정받기 위해 엄마 말을 잘 듣고, 칭찬받기 위해 아빠말을 거역하지 않았던 나를, 내 아이들은 닮지 않았다. 나는 그게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처럼 부모의 말을 잘 안 들었고, 반항했다. 아이 다웠던 적이 없었던 나는 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엄마가 되고 싶었고, 남편에게도 인정받는 아내가 되고 싶었다. 인정의 욕구는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인정의 말을 듣기 위해 뭔가 하기로 했다. 뭔가 생산적인 일 말이다. 돈을 벌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었고 홍 군이 주는 고정 생활비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먹을 것과 아이들 옷, 필요한 이것저것을 사고 나면 생활비는 얼마 남지 않았다. 홍 군은 해외에서 힘들게 일을 해도 돈이 모이지 않는다며 한 번씩 신세 한탄을 했다. 그 말이 꼭,

“그러니 생활비를 좀 아껴 써.”

이렇게 들렸다. 비교 대상은 같은 나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 비해 내 생활비는 아주 조금이라고 느껴졌다. 날 위해 사용되는 돈은 극히 일부였다. 가끔 커피를 사서 마시는 일, 현지 옷가게에 가서 옷을 사는 일이 전부였다. 여행을 자주 가지도 않았고, 비싼 옷이나 신발을 사지도 않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궁리했다. 한국이 아닌 방글라데시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때 떠오른 것이 벵골어였다. 방글라데시 공용언어가 벵골어인데, 당시 영어를 못 했기 때문에 벵골어를 공부해 의사소통했다.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인지 다른 한인들에 비해 현지 언어를 꽤 잘하는 외국인이 되었다. 벵골어 글을 쓰고 읽을 줄도 알게 되었고, 어려운 문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벵골어 통역사가 되자.’

조금만 더 공부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현지 말을 잘한다며 칭찬해 주었고, 가끔 통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매일 책을 보며 공부하고, 현지인들을 만나 직접 대화했다. 고급 어휘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통역사의 길은 너무 멀었다.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없었다. 오히려 차비와 학원비가 더 들었다.

차선책으로 생각한 것은 “책 놀이 교실”이었다. 내 두 아이는 해외에 살고 있었지만, 책을 워낙 좋아해 날마다 읽어주어야 했다. 책만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등 독후활동을 함께했다. 당시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는 여러 한인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을 대상으로 책 놀이 교실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경험 말고 객관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온라인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면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인터넷이 불안정해 강의가 자주 끊겼지만, 한가지 목표가 생기니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동 독서지도사 강의를 모두 듣고 시험을 봤다. 그게 뭐라고 두근두근 가슴이 떨려왔다. 시험을 모두 본 후 결과가 바로 나왔다. 80점으로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 자격증을 가지고 책 놀이 수업을 만들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의지가 불타올랐다. 책을 선택하고, 활동을 위한 재료들을 사들였다. 색종이가 흔하지 않은 나라였기에 큰 색 도화지를 사서 가위로 오리고, 여러 가지 스티커를 사고, 펜을 종류별로 준비했다. 드디어 아이들을 모집하고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날 보면 이모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책 놀이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기뻤다. 수업료로 재료를 사느라 다 써 버리긴 했지만, 그것 또한 기뻤다. 해외에서 내 손으로 돈을 번 최초의 일이었다.

그렇게 인정의 욕구를 스스로 채워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고, 엄마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집 나갔던 자존감도 다시 돌아오고, 남편에게 떳떳해지고 아이들에게도 당당하게 설 줄 알았다.

“자기야, 이것 좀 봐.”

노트북으로 이메일을 보고 있던 남편이 날 부르더니 메일 내용을 보여주었다.

[인도로 발령이 났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뭐라고? 인도라고? 인도로 가야 한다고? 이거 꿈이야?”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인도로 발령이 났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내 인생에서 해외 생활은 방글라데시가 전부일 줄 알았다.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야 했다.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억울했다. 이제 좀 당당하게 살아볼 만한데, 이제야 내 커리어를 스스로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내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있는데. 내가 홍 군을 선택한 순간부터 내 의지와 뜻은 깊은 물 속의 돌멩이가 되었다. 결혼을 결심한 그 순간부터 암묵적으로 동의 된 삶이다. 또다시 낯선 곳에 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생각하니 모든 것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돌아왔던 자존감은 문을 활짝 열고 다시 나가버렸다.

집에 있던 벵골어책을 모두 정리했다. 이제 막 방글라데시 생활을 시작한 친구에게 주기도 하고, 오래되어 너덜너덜해진 책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중급 어휘 책을 손에 들고 누굴 줄까 말까,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기념으로 한 권 정도는 남겨두기로 했다.

함께 책 놀이 수업을 하던 아이들에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을 했다. 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아이들의 엄마들은 서운해했다. 그곳을 떠나기 전, 아이들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함께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신나게 놀았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 방글라데시에 가게 되었을 때 홍 군의 의지가 컸다. 난 어느 나라로 가든 상관없었기에 그가 선택한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내내 괜찮지가 않았다. 아이는 어리고, 현지 언어는 못 하고, 아는 사람은 없고, 갈 곳도 없고, 남편은 회사에 가고. 온종일 집 안에 머물며 아이와 지내야 했다.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냐고 엄마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그 당연한 일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었지만 내 삶이었다. 주어진 인생 속에서 수많은 것들을 스스로 선택했다.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는 후회를 했다. 방글라데시를 선택한 후 눈물의 나날을 보냈지만, 그 선택에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살아 보려 노력했고, 결국 적응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떠나야 하는 방글라데시를 생각하며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그동안 내가 노력했던 모습이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인도 역시 내가 선택한 곳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난 방글라데시를 사랑하기보다 그곳에서 애쓰며 인정받았던 그 경험이 아까웠던 것이었다. 그 모든 선택과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그저 안타까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나라는 아니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존감을 챙기며 다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더는 미련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새로운 나라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 일이 무엇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야 할 나라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어떻게 살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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