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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n 30. 2020

비밀번호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서


그땐 몰랐다.

이 비밀번호를 이렇게 오래 사용하게 될 줄은.


스무 살이 되어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은행 통장.

 

은행 언니가 말했다.

“비밀번호는 본인 전화번호, 주민번호 등과 관련 없는 번호로 해주세요.”


그때 떠오른 번호는, 그 아이의 전화번호였다. 그 외의 번호는 떠오르지 않았다.


3년간의 짝사랑은, 설레기도 했지만, 아프기도 했다. 결국 고백 다운 고백 한번 못해봤지만, 그 아이의 전화번호는 가슴에 새겨지고 말았다.


지금은 가슴뿐만 아니라, 손가락에도, 머리에도, 눈에도, 새겨졌다.


계좌이체할 때마다 그 번호를 누른다.

가끔 그 네 자리를 입력할 때 그 아이가 떠오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번호 네 자리.

어린 시절 풋풋한 사랑의 기억이 담겨있다.

왜 그 아이가 좋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수줍던 내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

.

.

.


“자기, 비밀번호 뭐야?”


남편이 물어보면, 가끔 흠칫 놀란다.

남편과 나 사이에 비밀번호는 없지만, 사연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영원히 머물 공기가 아니라면,

비밀번호 설정은, 신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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