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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Sep 28. 2020

8.미술을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2장. 진짜 나를 찾기

 

초, 중, 고 학창시절.  평균 점수를 깎아 먹는 과목은 바로 미술이었습니다. 이론도 실기도 형편없었죠. 물감 사용법도 이해하지 못했고, 데생 하는 법도 몰랐습니다. 그냥 그 시간이 싫었어요. 그림을 너무 못 그렸거든요.

여고시절, 운동장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학교 건물과 그 옆으로 보이는 푸르른 나무를 그렸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도 좀 그렸던 것 같네요. 다 그리고 나니, 내가 봐도 이건 정말 아니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공간이 많이 비어 보였고, 엉성했습니다. 나무는 아파 보였고, 학교 건물은 낡아 보였어요. 역시나,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전, 캐릭터 따라 그리는 건 곧잘 했어요. 연습장 표지의 캐릭터를 보고 따라 그리는 거였죠. 꽤 비슷하게 그렸거든요. 하지만 그건 미술이 아니었어요. 낙서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그림을 어느 날 갑자기 그리게 되었어요. 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습니다. 조금의 전조증상도 없었어요. 

  방글라데시에 살던 때였어요. 남편과 대판 싸웠습니다. 왜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좀 크게 싸웠고, 속상해서 안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너무 화가나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그때 생각난 것이 젠탱글이었어요. 선과 점을 반복적인 패턴으로 그리는 그림인데요, 우연히 어느 사이트에서 본 게 기억이 났습니다. 연습장과 펜을 꺼내 엉성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제 첫 그림이었어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왜 싸웠는지, 왜 화가 났는지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정말 평안해졌어요.  

  플로우(몰입)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곧 이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즐겁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이다. - 미하이 칙센트-

제가 그림을 그리면서 경험한 게 바로 몰입이었나 봅니다. 그때의 경험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르던 제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스케치북을 사고, 펜을 사고, 물감도 사고. 유튜브를 보면서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학창시절 이후, 4B 연필을 다시 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거의 3년정도 된 것 같아요. 

한 동안 글을 쓰느라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게 펜과 스케치북을 가까이에 두고 있었어요. 글이 잘 써지지 않던 지난 달, 먼지가 쌓여 있던 스케치북을 다시 꺼냈습니다. 필통속에 잠자던 펜도 다시 꺼냈어요. 그 후 날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멈춰 있었기에 선을 그릴 때 뭔가 어색하고, 다시 여러 번 연습을 해야 했지만, 잠시 한눈을 팔았다고 저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어서 오라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환영해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행복한 몰입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그림도 글쓰기처럼 어디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기초가 없습니다. 이론도 없죠. 좋은 글을 쓰고 싶어 책을 보며 필사를 하듯,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며 따라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쓴 글로 책을 만들었듯, 언젠간 나만의 작품도 그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요. 

  학생때 미술을 잘 못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사실, 저도 놀라워요. 제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게 될 줄 몰랐거든요. 학교 다닐 때 배운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미술 과목이었던 것 같아요. 영어를 오래 배웠지만, 성인이 되어 외국인을 만났을 때 한마디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의 저자 김미란 작가님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디즈니 수석 캐릭터 아티스트인 그는 디즈니 제품의 모든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 캐릭터를 담당하고 있다고 해요. 신기한 것은 그의 이력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국내 대학에서 생물학과를 졸업했다고해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이 하고 싶어 무작정 LA로 갔다고 합니다. 그분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만 저에게 있는 재능이라면 그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또 그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고통이나 힘겹게 억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즐거웠어요.”

“저의 삶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지점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에서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중략)….. 칼아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테크닉이 아니라 자기만의 확실한 색깔, 개성이거든요.”


  자기만의 색깔과 개성으로 당당하게 디즈니에 입사해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를 그리는 김미란 작가님의 삶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그림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림은 힘들게 뭔가를 그리고 완성해야 하는 목표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즐겁게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어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말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전 요즘도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테크닉은 없지만, 나만의 색깔과 개성이 들어간 그림.   그림과 글쓰기는 단짝 친구인 것 같아요. 테크닉보다 중요한 노력과 꾸준함이 중요하고, 자기만의 색깔이 중요하니까요. 밀고 당기며 글과 그림이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보며 자라고,

아이들은 부모를 보며 자란다. 

아마추어는 꾸준함으로 성장하고,

꾸준함의 결실은 느리지만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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