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Jan 27. 2019

내 꿈은 벵골어 통역사

엄마 성장 스토리-1

처음 방글라데시에 살게 되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의사소통이었다. 영어도 방글라데시 공용어인 벵골어도 전혀 못해,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았다. 말을 못 하니 100따카면 살 수 있는 화분을 1,000따카나 주고 사기도 하고, 에어컨이 고장 나도 사람을 부르지 못해 더운 날 땀을 흘리며 그냥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대학 선배가 준 벵골어 책을 보며 간단한 단어를 외워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옹알이 수준의 내 벵골어에 현지인들은 그저 웃기만 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얻은  자유시간은 그래서 더욱 귀했다. 곧바로 선생님을 구해 수업을 하게 되었다. 6년 만이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이.......



내 첫 벵골어 선생님은 토마스이다. 토마스는 한국 사람들에게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돈을 많이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매우 잘 나가는 벵골어 선생님이었다. 10년 전, 그는 여러 외국인을 가르쳤고, 코이카 해외봉사단원들 가르치는 동종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선생님이었다. 하루 종일 수업이 있어서 매우 바빴지만 그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나 만큼 수업이 많은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제일 잘했죠. 난 지금도 내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 번씩 잘 나가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 하곤 했다.

한참 잘 나가던 그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를 크게 다쳐 수술을 해야 했다.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을 다 쓰게 되었다. 몸이 아파 수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회복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더 젊고 수업비가 싼 선생님들이 많아져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교통사고를 내면 무조건 도망을 가라는 말이 있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기다리면 주위 모든 사람들이 몰려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똑같이 보복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의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당해도 가해자를 찾기 힘들고, 보상을 받기는 더욱 힘들다. 의료보험도 없기 때문에 그저 돈이 있으면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돈이 없으면 빌리거나 아예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토마스도 가해자를 잡지 못했고,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의 이런 상황이 안타까워 처음엔 여러 외국인 학생들이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긴 병원 생활로 인해 그는 점점 잊혀갔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와 수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다들몇 번 하다 결국 그만 두곤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수업 태도에 있었다. 자주 몸이 아파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매 수업 시간마다 앓는 소리를 했다.


"없다.라는 부정사는 ‘네이’를 쓰면 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아마께 따까 네이.( 나는 돈이 없다.)”


가끔은 대놓고 신세한탄을 했다.

"이번 달에 우리 딸이 고등학교 수업료를 내야 하는데, 낼 돈이 없어요. 딸에게 너무 미안한 아빠예요."

"내 아내는 선생님인데 가정부 일도 할 수 있으니 필요하면 말 좀 해줘요."

"오늘은 다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병원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아요.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정당하게 수업료를 내고 수업을 받지만,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가끔씩은 수업료를 가불해 주기도 했다.


토마스와 거의 1년 정도 수업을 했다. 비록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내 벵골어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었다. 그와 공부하면서 급속도로 말이 늘었다. 기본적인 문법을 익혔고, 어휘를 늘려갔다. 드디어 현지인들과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해졌다.


대화가 가능해지니 글자를 알고 싶었다.


벵골어 글자는 힌디처럼 빨랫줄에 글자가 걸려있는 모습인데, 모음 11개, 자음 39개가 있다. 하지만 자음과 모음이 만나면 형태가 변하고, 자음과 자음이 만나 복자음이 되는 등, 좀 어려웠다.

난 글자를 읽고 쓰고 싶은 생각에 다른 선생님을 구해 글자 공부를 했다. 글자 하나하나 쓰는 법을 배우고, 문장과 낱말 읽는 법을 익혔다. 한글을 깨치는 아이처럼 글자 하나를 익힐 때마다 뭔가 희열을 느꼈다.


벵골어 공부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던
이유는 작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벵골어 통역사가 되고 싶었다.

다카에 살고 있는 많은 한인들 중에 현지 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한글과 섞어서 말하거나, 읽고 쓰는 것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 중에는 벵골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가끔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을 해주거나 통역을 해줄 때 내 마음에는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벵골어를 잘한다고  칭찬을 들을 때는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곤 했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날 더욱 성장시켜주었다.


무엇보다도 현지인들과 대화가 될 때 큰 기쁨을 맛보았다. 릭샤를 타고 가는 길에 릭샤왈라와 나누는 대화,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엔지니어를 불러 이런저런 의사소통한 일들, 우리 집 아야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시장에 가서 물건을 흥정하고 기분 좋게 가격을 깎는 일.......

현지인들이 쓰는 특유의 콧소리와 제스처, 혀를 살짝 말아 올려 발음하는 습관들이 나에게도 생겼을 때는 그들의 삶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국에서 현지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들의 문화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하면 그들은 신기하다며 말들 더 걸어주었고, 그들만이 쓰는 제스처를 취하고 , 약간은 어려운 비음으로 발음을 하면 더욱 마음을 열어주었다.


“내가 들어본 사람 중에 언니가 제일 말을 잘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돼요?”

“언니 통역 좀 해주세요.”


낮은 자존감으로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던 내가 누군가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날 더 열심히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놓지 않고 계속 공부를 했다.

벵골어 공부 @ sonya

방글라데시에 계속 살 줄 알았다. 벵골어를 더 공부해서 벵골어 통역을 하고, 영상을 번역하고, 벵골어 책을 만들고.......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꿈을 꾸니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님편이 이제 떠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설마,

다카를 떠나게 되겠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이제야 새로운 꿈을 찾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설마 이곳을 떠나지는 않겠지....

하지만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다.




“깨몬아첸? 아미 발로 아치. 아쁘니오 발로 아첸? 에콘 아말 방글라 어넥  불레 기애체. 에콘 아미 인디아에 타끼. 에이 까른에 방글라 볼떼 빠리나. 깨 성게 방글라 볼때 빠리? 마재마재 방글데스 아말 모네모네 아스체. 방글라데스 아마께 어넥 발로바시 디에체. 에봉 아미 제콘에 어넥 발오 타끼애치.

발로 타껜. 아발 데카호베 끼 나? 아미오 자니나.”


잘 지내나요? 전 잘 지내요. 당신도 잘 지내죠? 전 지금 방글라 말을 많이 잊었어요. 전 지금 인도에 있거든요. 그래서 방글라 말을 할 수 없어요. 누구랑 방글라 말을 해야 하나요? 가끔 방글라데시 생각을 해요. 방글라데시는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어요. 그리고 그곳에 살 때  정말 잘 지냈어요. 잘 지내세요. 또 볼 수 있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메흐씨(merci), 토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