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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01. 2021

보랏빛 아네모네처럼, 믿고 기다리는 게 있나요?

[꽃힐링에세이] 당신의 꽃


이른 아침, 베란다 문을 열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기대했건만, 진득하게 타는듯한 냄새가 코끝으로 전해졌다.

뿌연 연기가 고요한 도시를 감싸고 있다. 안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묘한 기분이 들어 얼른 문을 닫았다.

'럭다운된 지 이주가 넘었는데,  공기가 나쁠까? 사람과 자동차가 멈췄으니 공기가 좋아져야 하는데...'


뉴스에서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길거리에 시체가 누워있던 모습, 화장터 가득 시신을 태우는 모습....



내가 마시고 있는 공기 중에 코로나로 희생된 시신들의 연기가 맴돌고 있다 생각하니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문을 굳게 닫고, 집안에 웅크리고 앉아 들숨과 날숨을 쉬며 오늘도 평안하게 하루를 시작했음에 안도했다.



인도는 삶과 죽음, 부와 가난,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나라이다.

지금 그것 나누는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졌고,

차이는 극도로 심해졌다.

부를 가진 자들은 이미 이곳을 떠나 해외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 남아있는 자들은 떠나지 못한 자 또는 우리처럼 떠나지 않은 자들이다.



친했던 학교 선생님 한 명이  지난주에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프랑스어 보조 선생님으로, 모국어가 프랑스어가 아닌 아이들을 대상으로 정규 수업시간 외에 추가로 수업을 해 주던 선생님이었다.

 두 아이 모두  선생님의 학생이었다.


이번 인도변이 바이러스는 유독 젊은 사람과 아이들 감염률이 높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호흡기가 약한 사람들은 심각한 증상으로   있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녀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혹시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까 봐, 많이 아프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작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걱정이 돼서 연락을 못했다고 했다.

괜찮지 않은데 너무 괜찮다고 할까 봐, 

힘들게 지낼 것이 뻔한데,  지낸다고 할까 봐 

연락을 못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나는  괜찮다고,

 지낸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고, 잘 지내지 못하면서 잘 지낸다.



친구의 연락을 받은 , 학교 선생님인 그녀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보냈다.


"좀 괜찮나요? 당신과 당신 가족들이 모두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조금 후, 답장이 왔다.

"쏘냐, 고마워요. 어제까지는 많이 아팠는데, 오늘부터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당신도 잘 지내길 바라요."

오~ 감사합니다, 하나님.  회복되길 바랄게요. 몸조심해요”



간절히 믿고 기다린 그녀의 소식을 들은 후에야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네모네 @goodness



아네모네 슬픈 전설을 가진 꽃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에로스의 화살촉에 가슴을 살짝 스쳤는데, 그때 아도니스를 보게 되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항상 그와 함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로디테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도니스 혼자 사냥을 가게 되었다. 하필 멧돼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다.

나중에  사실을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죽은  자리에 꽃이 피어나게 만들었다. 아도니스의 붉은 피로 물든 꽃이 바로 아네모네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붉은색의 아네모네는 ’ 허무한 사랑' 또는 '속절없는 사랑'이다.


아네모네  색깔은 여러 개가 있다. 색깔 별로 꽃말이 조금씩 다르다. 

그중에 보라색 아네모네의 꽃말은 '당신을 믿고 기다립니다'이다.


아도니스는 죽음의 순간에 아프로디테를 믿고 기다린 것은 아닐까? 


보라색 아네모네 @goodness





 역시 누군가를 믿고 기다린 적은 많다.

그 믿음과 기다림이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기대와는 다른 결론이 나기도 했고, 믿음을 저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힘들었다.

내가 먼저 관계를  않았지만,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하니 저절로 관계가 정리되곤 했다.



여러 관계 중에서도 믿고 기다림의 결실이 맺어진 건 남편이다.

오랜 장거리 연애, 결혼  해외 취업으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시간들 모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믿고 기다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간절하게 믿고 간절하게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터널의 끝이 보이기를, 

 터널의 끝엔 실망이 아닌 희망이 있기를,

붉은 아네모네가 아닌 

보랏빛으로 물든 아네모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를 

소중 사람들에게 평안이 찾아오기를,


이것은 신뢰를 넘어선 강한 열망이다. 

또한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 



고요함이 맴도는 아침,

내일은 부디 자욱한 연기의 자취가 조금  하기를,

생과 사에서 부디 생으로의 무게가  하기를,

남겨진 가족들의 삶의 무게는 

바람을 타고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나에게 허락된 삶이 부디 가볍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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