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16
엄마는 12월 초가 되면 김장 준비를 하셨다.
속이 꽉 찬 배추를 밭에서 뽑아 경운기 가득 싣고 오셨다. 시골에서 키운 배추는 절반으로 잘라도 내 얼굴보다 훨씬 컸고, 한 포기가 어린아이만큼 무거워서 배추를 옮기는 일도 큰일이었다. 마당에 커다란 다라이를 놓고 옆 동네에서 퍼 온 바닷물을 가득 채웠다. 짜디짠 바닷물에 오래 담가 두어도 배추는 쉽게 숨을 죽이지 않았다.
전라도 김장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양념이 필요했다. 특히 엄마는 여러 종류의 젓갈뿐만 아니라 미나리, 톳 등 일반적이지 않은 재료도 넣으셨다. 한 번은 유자 껍질을 넣으신 바람에 김치에서 유자 향이 났다.
어른이 된 후 서울에 사는 친척 집에서 먹어 본 김치 맛은 엄마의 김치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맵고 짠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담백한 맛이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러 맛의 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담백하다”라는 말은 여러 상황에서 두루두루 쓰이는데, 사람에게 담백하다고 할 경우에는 “욕심이 없고 순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음식이 담백할 때는 “깔끔하고 느끼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담백한 사람은 거짓이 없고 진솔한 사람이고 담백한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고 맛있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내 친구 수키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담백한 사람이다. 간호대학 3년 내내 붙어 다닌 그 친구는 애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절대 빈 소리를 하지 않으며 웬만해선 칭찬 같은 거 하지 않는다. 내가 쓴 책 또한 느끼하다며 절대 읽지 않는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물론이거니와 사랑과 비슷한 투의 어휘에 느끼하다며 치를 떤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가면 하루 휴가를 내어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보러 오고, 광주에서 시골까지 3시간을 운전해 보러 오기도 한다. 결혼도 안 한 녀석이 내 아이들을 위해 뽀로로 놀이동산까지 함께 동행해 주기도 했다. 자주 연락하진 않지만, 절대 연락이 끊어지지 않는다. 담백한 내 친구 수키와는 늙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먼저 죽지 말라는 빈 소리를 해대며 진심인 듯 농담을 내던질 것 같다.
담백한 글은 어떤 글일까?
문장은 형용사, 명사, 부사, 동사, 조사 등의 품사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글쓰기 책에서는 담백한 글을 쓰려면 형용사와 부사 사용을 자제하라고 말한다. 명사를 꾸며주는 형용사, 동사를 꾸며주는 부사를 적절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사실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형용사와 부사가 매우 중요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오랜만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진짜 오랜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뉘앙스가 다르다. 친한 사람이거나 더 반가운 사람일 때 “진짜”라는 부사를 사용하게 된다. 친구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간 경우에도 그냥 “맛있다”라고 하는 것과 “정말 맛있다”라고 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즉, 대화에서는 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부사나 형용사를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이런 부사를 빼라고 한다. 어째서 글을 쓸 때는 꾸며주는 말을 빼라고 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내 친구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담백한 내 친구는 칭찬을 자주 하진 않지만, 어쩌다 한 번씩 칭찬을 해준다. 그러면 그 칭찬은 진짜가 된다. 칭찬을 자주 하는 사람의 말보다 어쩌다 한번 해주는 친구의 칭찬이 진심으로 다가온다.
글도 마찬가지다. 꾸며주는 말이 잔뜩 들어간 문장은 읽을 때는 신선하고 좋아 보이지만 오래 남지 않는다. 반면 부사와 형용사를 자제한 문장은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도록 귓가에 맴돈다.
담백한 문장은 담백한 음식이나 담백한 내 친구처럼 질리지 않고 오래 남는 맛인 것 같다. 진짜 좋은 재료는 많은 양념을 넣지 않아도 그 고유의 맛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것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부사나 형용사로 꾸미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는 문장을 써내야 하겠다.
그냥 먹어도 단맛이 나던 엄마의 배추는 정말 좋은 재료였는데, 왜 그렇게 양념을 많이 넣으셨을까?
엄마를 닮은 나 역시 매번 양념을 넘치게 넣고 있으니, 사람도 글도 김치도,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는 건 힘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