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마주친 순간을 쓰다_ 모래시계

글과 당신. 13

by 선량

뉴델리에 있는 여행자 거리, 빠하르 간지에 갔다.

그 곳에는 다양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인도 옷가게들이 있다. 화려한 무늬의 옷들이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한번 물에 담그면 빨갛고 파란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절대 세탁기에 넣으면 안 된다. 어떤 옷들은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가슴이 깊게 파였거나 등이 깊게 파인 옷들, 바람이 불면 한들거리며 허벅지가 다 드러 나는 옷들. 일상생활에서는 절대 입지 않을 옷들이지만 여행지에서는 어쩐지 저런 옷을 입을 만한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여행을 다니는가 보다. 일 상생활에서 내기 힘든 용기를 얻기 위해서.

난 지금 여행자가 아니고 일상 생활자이기에 화려한 옷들은 패스하기로 했다.

한 가게 앞에 “한국인 환영”이라는 말이 한글로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화장품 10개 사면 15% 할인”이 라고 쓰여 있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너무 한국스러운 한국말에 기분이 이상했다.

“화장품을 열 개나 살 수 있을까?” 함께 간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비누 다섯 개, 립글로스 2개, 핸드크림 2개, 샴푸 1 개, 스킨 1개 사면 열 개도 넘게 사겠네.”

“하긴 그렇네.”

친구의 말에 웃었지만, 비누가 화장품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과 얼굴에 사용되는 것이니 화장품의 일부라고 할 수 있으려나?

여러 화려하고 값진 상품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모래시계였다. 진한 황금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앤틱한 케이스에 보라색 모래가 담겨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모래시계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마음을 재보았다. 모래시계를 사고 싶었던 이유는, 친구 집에 갔을 때 봤던 모습이 꽤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모래시계로 정확히 시간을 맞춰 차를 우려냈다. 좀 있어 보였다고나 할까? 이상하게도 모래시계에 맞춰 정확히 우려낸 그 차가 더 깊은 맛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좀 망설였던 이유는 내가 과연 차를 우려먹긴 할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집 에는 여러 종류의 차(tea) 가 있다. 인도 대표 차인 아쌈 티(Assam tea)부터 블랙베리가 함유된 블랙 커 런트 티(Black current tea), 맛이 깔끔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재스민 티(Jasmine tea)까지. 하지만 그것들을 자주 마시지 않는다. 커피는 온종일 마셔 대지만 차는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모래시계를 집어 들었다. 주인아저씨가 부르는 가격의 절반을 후려쳐야 했지만 그럴 만한 배짱은 없었다. 적당한 가격으로 흥정을 한 뒤 (겨우 50루피를 깎았다), 가방에 쑤셔 넣었다. 모래시계도 샀으니 이제 좋은 차를 마시며 다도를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차를 우려내는 최적의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티백을 건져내는 시간은 투명했던 물이 약간 혼탁해질 때이고 가끔은 종일 건져내지 않은 채 우리고 또 우려 마실 때도 있었다. 차가 가장 맛있게 우려지는 시간이 2분 정도라고 한다. 모래시계의 모래 가 중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다 떨어지는 시간이다.

모래시계에 담긴 모래는 이미 모래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래시계라고 부른다. 공사장에 있는 모래는 여 러 가지 물질과 섞여 시멘트가 되고, 모래 안에 석영이라는 물질이 뜨거운 불과 만나면 유리가 된다. 모래가 미술가의 손과 만나면 모래 예술(sand art)이 되기도 하 고, 아이들과 만나면 모래 놀이가 된다. 모래가 어떤 그릇에 담기는지, 어떤 사람과 만나는지에 따라 그 가치와 용도가 달라진다.


사람은 어떨까? 사람의 마음이 어떤 그릇에 담기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와 용도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내 글은 어떤 그릇에 담겨있을까?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 역시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응원의 글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 역시 뜨거운 응원으로 보답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좋은 대화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좋은 글은 좋은 생각을 낳는다. 좋은 댓글은 감사를 낳고, 감사는 일상의 행복을 만든다.

내 글이 따뜻한 마음 그릇에 담겼으면 좋겠다. 내 글 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2분 동안 차를 우려 향기롭게 마시려고 샀던 모래시 계는 아이들의 손에 들어가 결국 장난감이 되고 말았다. 역시, 모든 물건의 가치는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달린 것 같다.

글을 쓰는 나에게 들어온 모래시계는 글감이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수고로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