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
분명히 따뜻한 봄이었다. 길었던 겨울이 끝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웅크린 어깨를 펴고 봄을 만끽하며 거리를 활보하리라! 다짐했다.
다짐이 무색하게 여름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지더니, 이제는 끈나시에 크롭 티를 입고 다닌다.
긴 바지뿐인 아이들을 위해 급하게 쇼핑몰에 가서 여름옷을 골랐다. 이제는 취향이란 게 생겨버린 아이들에게 엄마 취향대로 옷을 골랐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아이들과 나의 취향이 적절히 양보된 옷을 골라야 한다.
쇼윈도엔 화려한 여름옷들이 진열되어 있다. 유난히 녹색 계통 옷이 많은 걸 보니, 올여름 유행 컬러인가 보다. 패션이나 유행에 워낙 둔감한 나는 그나마 가장 무난한 데님을 좋아한다. 이번에도 고민하다 데님 반바지를 골랐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여름이 한 달 정도 빨라졌다고 한다. 원래는 6월이 돼야 여름이 시작되는데, 5월에 갑자기 더워져서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
이 정도의 더위는 뉴델리에서 이미 많이 경험해봤지만, 밀라노에서의 여름은 처음이라서 뭔가 많이 낯설다. 그나마 좋은 점은 습하지 않다는 것이다. 햇살은 뜨겁지만, 그늘로 자리를 옮기면 시원하다.
아무리 더워도 다들 모자나 양산을 쓰지 않는 게 좀 신기하다. 오히려 햇살을 즐기는 눈치다. 햇볕에 한껏 살갗을 드러내 놓고 활보한다. 벌겋게 익은 피부를 가리지 않는다.
덕분에 나도 요즘 조금 더 과감해졌다. 뉴델리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잘 가리고 다녔는데, 밀라노에서는 잘 들어내 놓고 다닌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도쯤이야 뭐.... 혐오스러운 복장만 아니면 되지 않을까?
"엄마, 그 옷은 좀 아니지 않아? 엄마는 결혼했으니까 그렇게 입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산 원피스를 입은 날 향해 아들이 말했다.
"왜? 이게 어때서?"
"아니, 치마가 너무 짧잖아. 그리고 등이 많이 파였어."
"헐.... 이게 뭐가 짧아? 밖에 나가봐~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엄마는 엄마잖아.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 옷 입으니 결혼 안 한 사람 같잖아."
그 옷은 자라 매장에서 산 원피스로, 하얀 바탕에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가로로 죽죽 그어져 있다. 내 가슴이 좀 더 컸더라면, 아니 모유 수유로 가슴이 이렇게 처지지 않았다면 좀 더 옷맵시가 났을 텐데.
그랬다면 가슴골이 멋지게 보였을 텐데. 많이 아쉽다. 그래도 등은 굴곡이 필요 없으니 좀 보여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조용히 원피스를 벗었다. 생각보다 보수적인 아들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냥 입어. 입으려고 산 건데, 이럴 때 입지 언제 입으려고? 다른 여자들은 더 과감하게 하고 다니던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쁘니까 그냥 입어."
"그럴까??"
홍 군의 말에 넣어두었던 원피스를 다시 꺼냈다. 아들에게 눈을 흘기며 청바지를 벗고 원피스로 다시 갈아입었다.
"너 딱 기다려. 엄마가 뱃살 빼고 크롭 티 입는다!!!"
뱃살이 들어가고 복근이 생기는 날, 크롭 티를 입고 인증샷을 남기겠다!!
과연 이번 생에 가능할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