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요즘 이 말이 실제가 되어 내 골수를 쪼개는 듯하다.
며칠 전 아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지내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인다고, 즐거워 보이고 따뜻해 보인다고. 밀라노에서의 삶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질투가 난다고.
나는 그분의 말에 깔깔깔 웃었지만, 한 켠에선 눈물을 흘렸다. 역시 삶은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는 것이다.
딸아이가 화상을 입은 지 4주가 되었다. 3주 차가 되었을 때부터 상처는 많이 아물어 거즈와 붕대를 제거하고 상처를 오픈했다. 하지만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옷 사이로 흉터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이는 왼쪽 가슴 전체에 2도 화상을 입었었다.
수요일 오후 5시가 되기 전, 아이는 줌 영어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노트북과 아이 사이에 컵라면이 있었다. 아이는 라면이 잘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분주하게 그 옆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콘센트에 걸려 넘어졌다. 하필 노트북 케이블이 그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었고, 노트북이 컵라면을 밀쳤다. 컵라면은 그대로 딸아이의 가슴으로 쏟아졌다.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바로 아이의 옷을 벗기고 욕실로 뛰어갔다. 큰아이가 큰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어서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큰아이는 중간에 큰 일을 끈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물을 틀어 아이 가슴에 쏟았다.
아이의 가슴에 커다란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왼쪽 가슴이 벌겋게 변하고 있었다. 표피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지안아~ 아빠한테 빨리 전화해. 소은이 병원 가야 해~"
아이는 춥고 아파서 소리 지르며 울었다.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남편이 레지던스 매니저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다. 매니저는 숙소 바로 앞에 병원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젖은 아이 옷을 갈아입혔다. 윗도리는 입히지 못했다. 냉동실에 있던 차가운 어묵 봉지 하나를 들고 아이 가슴에 올렸다. 타월을 하나 걸치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병원은 하필 노인전문 요양병원이었다. 아무런 처치도 받지 못한 채 다른 어린이 전문병원으로 가라고 소견서를 써주었다. 아이는 너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이 대신 아프고 싶었다.
남편이 드디어 왔다. 병원에서 소개해준 어린이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나는 아이를 안고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 대신 아프고 싶었다.
겨우겨우 어린이 전문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보호자는 한 명 밖에 들어갈 수 없어서 내가 아이 옆을 지켰다. 밀라노에 온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집도 구하지 못해서 의료카드가 없었다. 더욱이 이탈리아는 지역마다 주치의가 있어서 종합병원 진료를 보려면 주치의 소견서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미리 만들어 온 codice fiscale(납세번호로 우리나라의 주민번호와 비슷함)가 있어서 접수는 가능했다.
아이를 베드에 눕히고 산소 포화도를 측정했다. 아이의 호흡과 심박수를 확인했다. 아이와 나의 코로나 검사를 했다. 아이는 여전히 아파했고, 의사 선생님은 수술 중이라 바로 오지 못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나고 나온 외과 전문의 선생님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2도 화상이라고 했다. 가장 아프지만 다행히도 가장 괜찮은 화상이라고 했다. 몸 전체의 5% 이상 화상을 입었으면 입원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4%라서 입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링거를 맞고, 주사를 맞고, 드레싱을 했다. 아이의 살갗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화상 거즈를 붙이고 붕대를 감은 후 며칠 뒤에 외래로 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아이는 통증과 싸워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갔다. 붕대를 풀고, 화상 부위를 소독하고, 죽은 피불를 긁어내고 화상 크림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과정을 여러 번 하면서 아이는 너무 아파 울었고, 너무 쓰라려 울었다. 마지막엔 너무 가려워 울었다.
아이의 세 번째 병원 진료를 보던 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한쪽 가슴의 유두가 보이지 않았다. 화상 상처와 함께 유두가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 눈물이 났다. 남편 차로 돌아와 아이를 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내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이의 여자로서의 삶을 내가 망친 것은 아닌가?
"엄마 나는 젖꼭지 없어도 괜찮아...."
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오열했다.
그다음 진료 때 자세히 보니, 유두가 보였다. 정말 다행히도 유두 바로 위까지 상처를 입었다. 나는 다시 한번 울고 말았다.
2주가 지나니 딱지가 생겼다. 3주가 지나니 딱지가 모두 떨어졌다. 4주가 된 지금은 새 피부가 생겼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는 동안,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무진 애를 먹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응급실이 모두 무료이다. 특히 15세 이하 아이들은 모든 병원비가 무료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보험 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만 팔천 원 정도의 병원비를 내고 외래 진료를 보았다. 나는 이게 어딘가 싶었다. 의료보험 카드가 없으면 병원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너무 감사했다. 더욱이 응급실에서 여러 처치를 했음에도 무료라는 말을 듣고, 너무 신기했다. 이탈리아의 세금이 월급의 40퍼센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보다. 그 더분에 개인 보험을 들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세금이 너무 비싸서 실수령액이 적다고 하니, 그건 싫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응급실과 병원을 이용해보니 좋기도 했다.
아이가 붕대를 감고 학교에 가던 날 아침,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소은이에게 다가왔다. 괜찮냐고 묻더니 아이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너무나 예뻐서 감동하고 말았다.
아이의 상처가 다 아물고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어서야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엄마였지만, 죄인이었다. 아프고 가려워서 괴로워하는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죄책감은 나를 좀먹였다.
그때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선량님, 저도 딱 그 나이 때 가슴에 화상을 입었어요. 뜨거운 물을 가슴에 부었지 뭐예요. 저도 그때 병원 다니느라 엄청 고생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흉터 하나도 안 남았어요. 아이들은 회복력이 좋은가 봐요. 너무 죄책감 갖지 말아요. 아이도 괜찮을 거예요."
아이의 가슴에 큰 흉터가 남아있을까 봐 걱정했다. 그게 아이의 인생이 큰 오점으로 남을까 봐 염려되었다. 그런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말을 들으니 위안이 되었다.
우리도 시간이 지나면 이 일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이미 통증과 가려움이 사라진 딸아이는 웃음을 되찾은 것 같기도 하다. 아픈 게 싫긴 하지만, 엄마가 돌봐주는 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한다.
밀라노에 사는 우리의 모습은 분명 희극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엔 말 못 할 문제들이 여전히 쌓여있다. 그러니 삶의 모습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그저 주어진 장소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살아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비극은 되고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