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이 되어 우리는 다시 돛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때 이제는 고향 땅에 닿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레아를 돌아서 가고 있었을 때 파도와 북풍이 배를 떠밀어 키테라까지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임명현 옮김, 돋을새김]
“우리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자. 인도에 더 살면 분명 후회할 것 같아. 자기 몸도 너무 걱정되고. 아이들이 한국 학교에 적응해야 하겠지만, 아이들이니까 곧 적응할 거야. 코로나가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의료 시설이 열악한 곳에서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인 것 같아.”
홍 군은 담담하게 내 말을 듣기만 했다.
인도에서 살게 된 건 순전히 홍 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생 때부터 인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인도로 가라”는 마음을 받았다고.
그 후 인도로 가기 위해 대학생 해외봉사에 지원했지만, 인도가 아니라 네팔로 가게 되었다. 네팔에서 날 만났다. 졸업 후 다시 인도로 가기 위해 “인도 유학원”에 취직했다. 그는 푸네라는 곳으로 유학 온 한국 청소년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하필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한국 중고등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도피하다시피 온 아이들이었다. 한마디로 학교도, 부모도 지켜주지 못한 돈 많은 아이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
그는 1년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에도 그는 해외에서 살 수 있는 길을 호시탐탐 알아보았다. 매일 밤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결국 가게 된 곳이 방글라데시였다. 방글라데시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슬람의 나라였고, 가난한 나라였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두 아이를 키웠다. 아이들을 처음으로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이제 나도 한인 사회에서 일을 좀 해보려 꿈틀대던 찰나, “인도로 발령이 났습니다. 준비하세요.”라는 회사 메일을 받았다. 결국 돌고 돌아 인도로 가게 되었다.
힘들게 인도로 온 만큼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웬 걸, 홍 군은 인도에서 지내는 내내 마음의 불안을 경험했다. 공황 증상 때문에 차를 오래 타는 것도, 멀리 여행을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진 것이었다.
인도에 온 지 3년 만에 이곳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래, 그러자.” 그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회사에 말해. 그만두겠다고. 애들한테는 내가 말할게.”
“알겠어.”
“짐 정리하고, 학교 서류 준비하려면 필요한 게 많겠지만, 아직 두 달 남았으니까. 천천히 하자.”
“알겠어.”
“한국 가면 어디서 살지? 뭐, 어디든 있겠지 뭐.”
“그래. 미안해….”
“뭐가 미안해.”
“그냥 다…. 자기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알면 됐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모든 아쉬움과 후회를 놔 버린다. 내 결정에 온갖 긍정을 담는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살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한국 학교와 한국 물가에 적응하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비록 집 살 돈은커녕 전세 값도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방글라데시와 인도에서 사는 동안에는 집이나 전세 값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회사에서 매달 주택 지원비가 나왔다. 10년 전에 만들었던 청약통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만, 그 통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게다가 홍 군은 그 흔한 청약통장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진작에 집을 하나 사두었어야 했나…. 아쉬움이 밀려왔다. 한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제일 먼저 어디서 살 것인지가 걱정되었다. 대출밖엔 답이 없지만, 과연 대출이 가능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홍 군은 해외에서 일하는 동안 한국 휴대폰 번호를 해지해버렸고, 휴대폰 번호가 없으니 카드 하나 만들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은 곧 신용 등급이 낮은 결과를 낳았다. 물론 나는 한국 휴대폰 번호도 있고, 공인 인증서도 있고, 카드도 있고, 적금도 있었지만!
직장이 없는 전업주부였다.
이렇게 해외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전세 값 하나 못 모았다는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알뜰히 모은 월급보다 집 값은 더 빠르게 올랐다. 부동산도 주식투자도 전혀 하지 않았던 우리였기에, 기댈 수 있는 건 통장에 고이 잠자고 있는 월급뿐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길바닥에 나 앉겠어?”
책임감 없는 말이긴 하지만, 용기를 주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야, 밀라노…. 어때?”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그를 설득한 다음 날, 그가 이상한 말을 했다.
“밀라노가 뭐?”
“밀라노에 가서 살아보는 거 어떠냐고.”
“웬 뜬금없이 밀라노 야?”
“아니, 김 차장님 있잖아. 그 양반이 몇 달 전에 밀라노로 갔거든. 같은 업계로 이직한 건 내가 말했지? 그 차장님이 얼마 전부터 나한테 밀라노로 오라고 그랬거든.”
“뭐? 무슨 밀라노 야. 그러려면 이직해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나 유럽은 좀 무서워.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들이 위험하다잖아.”
“그런데 이탈리아는 좀 다르긴 해. 유럽스럽지 않대. 암튼 차장님이 고민해보라고 하시네. 부법인장 자리가 있다고. 조건은 더 좋더라고. 밀라노… 한번 가 볼까?”
“에이, 난 싫어. 갑자기 밀라노라니, 이제 나 한국 가서 살 생각하고 있는데. 난 싫어.”
단호하게 말했다. 유럽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곳이었다. 방글라데시나 인도는 살기엔 조금 불편한 면이 있지만, 동양인이라고 무시 하진 않는다. 하지만 유럽은 무서웠다. 유럽에서 살 자신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과거에 그린 그림이 떴다. 핀터레스트에서 본 풍경이 너무 멋있어서 그린 그림이었다, 다시 보니 이탈리아였다. 내가 그린 그림 중 여러 개가 이탈리아였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밀라노를 검색해봤다. 두오모 성당 모습과 오래된 트램의 모습, 옛 유럽풍의 건물들. 나는 그 풍경에 매료되어버렸다. 마치 이탈리아에 갈 운명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유럽에 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기야, 밀라노…. 우리 가볼까?”
그 말을 꺼낸 순간, 내 마음은 정해져 버렸다. 밀당도 없이, 썸도 없이.
“나는 동료들 중 두 명을 뽑아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아 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토파고이 족이 주는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고 귀향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지요.”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임명현 옮김, 돋을새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사진은 나에게 로토스였다. 꿀처럼 달콤한 도시의 모습에 매료되어 귀향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