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델타 변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건

by 선량

딩동~

부산하게 짐을 정리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코로나 시국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급하게 마스크를 쓰고 문을 여니, 경비 아저씨 손에 작은 상자가 들려 있다. 상자를 뜯어보니 수면 유도제가 들어있다. 벌써 세 번째 택배다.

며칠 전에는 수면을 위한 안대가, 그전에는 수면에 도움을 주는 멜라토닌 약품이 배달되었다. 지난주에는 신경정신의학과에 가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왔었다. 약국에 가서 수면에 도움을 주는 약을 직접 사 오기도 했다. 그는 지금 가장 잠이 잘 오는 약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인도를 떠나기로 결정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짐을 버리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 생각하며 보관만 해 두었던 물건들이 서랍과 붙박이장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두 아이의 온라인 수업과 하루 세 번 식사 준비, 글을 쓰는 일까지 하느라 최소한의 집안일만 하며 지냈다. 가족들의 동선을 따라 발에 밟히는 것이 없을 정도로만 청소하고, 책장이나 서랍장 위에 쌓여 있는 먼지는 아예 모른 척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그 정도인데 눈에 안 보이는 서랍장 안의 물건들은 거의 방치에 가까웠다. 그래도 화장실 청소는 꼬박꼬박 했다. 그건 최소한의 위생과 주부로서의 의무를 유지하기 위한 자존심이었다.



작은방에 있는 플라스틱 서랍장은 오래전에 고장 나 뒤틀려 있었다. 일단 그것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맨 위 칸 서랍을 여니, 박스도 뜯지 않은 로션과 크림, 언니가 준 화장품 샘플들이 가득 있었다. 유통기한이 5년이나 지난 것들이었다. 피부에 자신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 산지 몇 년 째이다. 아깝지만 박스 채 쓰레기통에 버렸다. 두 번째 칸에는 문구용품이 가득 들어있었다. 언젠간 다시 책 놀이 수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스티커, 리본, 크레파스, 벨크로 등이었다. 몽땅 버릴까 하다 왠지 아쉬워 바구니에 다시 넣어두었다. 세 번째 칸에는 해외 생활에 유용한 의약품이 들어있었다. 뽀로로 밴드, 화상 거즈, 듀오 덤, 마데카솔, 리도멕스.... 그 사이로 그의 수면제가 보였다. 유통기한이 3년이나 지나있었다. 수면제를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바구니 옆에 두었다. 이번에도 미니멀 라이프는 안드로메다로~~



"내 수면제 못 봤어?"

"어.... 봤는데.... 그거 유통기한이 많이 지났더라고."

"그래서 버렸어?"

"버렸나? 기억이 안 나네."

"그걸 버리면 어떻게 해!"

"아니, 유통기한이 많이 지났더라니까."

"그래도 나한테 물어보고 버려야지!"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분명히 내가 한 행동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든지 쉽게 생각하는 성향 때문인지, 노화에 의한 기억력 감퇴인지 모르겠다. 내 행동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으니 쉽사리 반박하지 못하겠다.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내가 했던 행동을 한 번 더 되뇌는 습관이 생기기까지 했다.

작은방으로 들어가 약품 바구니 근처에서 수면제를 찾아 그에게 건넸다.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유통기한 지난 건 먹지 마. 그러다 큰일 난다."

"그래도 한국 수면제가 제일 좋은데.... 수면제 먹고 그냥 푹 자고 싶단 말이야."




인도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한국으로 보낼 짐과 버릴 짐을 나누고, 비행기로 가져갈 가방을 준비해야 했다. 귀국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공항 출입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현지 통장을 정리하고, 아이들 학교 서류를 준비하고, 혹시 모를 비자 연장 신청을 하고, 코로나 검사를 하고, 이사 업체를 알아보고, 인도에서 며칠 머물 숙소를 예약하고, 한국에 도착 후 자가격리 숙소를 알아보고.......

이 모든 일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수면제" 획득이었다. 그것도 효과가 아주 좋은 것으로.

여기저기서 수면제를 구한 그는 수면 효과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밤마다 수면제를 복용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반 알만 먹었을 때는 전혀 효과가 없는 듯했다. 그래서 다음 날엔 한 알을 모두 복용했다.

"약이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잠이 안 와. 한국 수면제가 제일 좋은데. 어떡하지?"

"조금만 더 기다려봐.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다른 약을 좀 더 구해봐야겠어."

그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눈 후 잠자리에 누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3분 즈음 지났을까? 그는 깊은숨을 몰아 쉬며 잠들어 있었다.




"이거 자기가 한번 먹어볼래? 수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한번 먹어봐."

아마존으로 구입한 멜라토닌 수면유도제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멜라토닌은 뇌에서 분비되는 생체 호르몬으로 일반적인 수면제처럼 중추신경계를 억제하여 수면을 유도하는 것과 다르게 멜라토닌 수용체를 활성화시켜 자연적으로 수면을 유도하는 약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판매되지 않지만, 인도를 비롯한 미국 등의 여러 나라에서는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남편이 산 멜라토닌은 껌처럼 생긴 것으로 입에 넣고 녹여 먹는 것이었다. 평소에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잘 자는 나에게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일단 그를 위해 마루타가 되기로 했다. 10시 즈음에 멜라토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상하게 잠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날보다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새벽에 일어나고 말았다. 머리가 아팠다. 두통약을 먹으며 말했다.

"뭐야, 효과가 하나도 없네. 원래 잘 자는 사람에겐 효과가 없나 봐!"

그의 수면제를 발로 자근자근 밟아 가루로 만들어 저 세상으로 날려버릴까? 그러다 영원히 푹 자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로 받아쳐볼까?



그의 비행기 공포증은 비행기를 탈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급기야 신경쇠약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먹더라도 아주 조금만 먹었다. 가끔 헛구역질도 했다. 비행기에서 잘 자기 위해 수면 안대를 사더니 밤마다 안대를 끼고 잤다. 다른 중요한 일은 뒤로 한채 비행기에서 잘 자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샐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를 달린 지 아흐레가 지나고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 멀리 화톳불이 보일 정도로 고향땅이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달콤한 잠이 나를 덮쳤습니다. 나는 고향땅을 빨리 밟고 싶은 마음에 다른 동료들에게는 돛 아래 부분을 조정하는 일을 맡기지 않고 줄곧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지쳐 있었지요.”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임명현 옮김, 돋을새김]



"자기가 밤에 잠을 못 자는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낮잠을 자니까 그렇지. 낮잠 자니까 밤에 잠이 안 오지!!!"

이전 04화3. 키클롭스 같은 상황을 이겨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