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살던 집을 나가는데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결혼 후 10년 동안 일곱 번째 집이었다. 새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은 언제나 다르다. 기대하며 들어갔다가 무덤덤하게 나왔다. 다음 집은 좀 더 좋기를 바라면서.
어떤 집은 매우 좋았지만, 집주인이 나빴고, 어떤 집의 집주인은 좋았지만, 집이 나빴다. 집도 집주인도 완벽한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일곱 번째 집은 집주인도 집도 심하게 나쁘지도, 심하게 좋지도 않은 그럭저럭 무난한 집이었다.
“안정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네요. 누구라도 힘든 상황이에요. 지금까지 잘 견딘 것이 대단한 일처럼 보입니다. 해외에서 계속 이사를 다니는 것도 안정감과 관련이 있어 보여요.”
노트북 작은 화면을 통해 들리는 상담사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바위처럼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꺼내지 못했던 말, “안정감”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결핍된 단어였다. 그는 폭풍처럼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결혼 후 나는 참 많이도 눈물을 보였다. 속상하면 울고, 슬퍼도 울고, 우울해도 울고, 책을 읽다 울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고, 아파도 울었다. 우는 행위에는 감정의 정화 효과가 담겨 있어서 부정적인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곤 했다. 실컷 울고 한숨 자면 고단했던 마음도 서운했던 감정도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기쁨의 감정도 슬픔의 감정도 잘 표현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지만, 딱 하나 해학이 사라져 버렸다.
그랬던 그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감정의 틈에서 조금씩 조금씩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누나가 되어 그의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쓰다듬었다.
40도가 넘는 무더운 인도의 여름. 마스크를 두 개 쓰고, 페이스 실드까지 착용했다. 혹시나 모를 감염 위험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위생장갑도 준비해 두었다. 공항은 예전보다 한산했지만,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인도를 떠나고 있었지만, 언젠간 다시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입국장에 들어섰다.
티켓에 나온 보딩 타임은 저녁 7시였지만, 7시가 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비행기에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기에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허기를 달래야 했다. 두 아이는 의자에 앉아서 김밥을 먹으며 핸드폰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핸드폰 게임 좀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그거 아니면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잔소리로 그쳤다.
“나랑 좀 걸을래?”
비행기 타기 약 1시간 전, 그의 손을 꼭 잡고 공항을 걸어 다녔다.
바로 옆 게이트에서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려고 길게 줄 서 있었는데, 다들 평상복 위로 하늘색의 보호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보호복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인원으로 막아주는 보호복이 아니라 나이트가운처럼 생긴 부직포 재질의 보호복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리 부분을 끈으로 묶으니,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아랫부분이 펄럭였고, 소매 부분 역시 위로 올라갔다.
“저게 무슨 보호복이야? 안 입는 만 못한 거 아닐까? 저게 코로나를 막아 줄 수 있을까?”
그들을 힐끔 거리며 함께 소리 낮춰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그가 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비행기에 오를 시간이었다. 과연 비행기에서는 안전할까?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괜찮을 거라 말하긴 했지만, 델타 변이 바이러스 코로나 상황에서 그의 불안까지 껴안고 가는 이 여정이 결코 쉽진 않을 것 같았다.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 힘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평소에는 알지 못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선 자신도 모르게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낸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불운을 타고난 자여, 내가 그대를 재앙에서 구해 주겠습니다. 내가 준 이 약을 가지고 키르케의 궁전으로 가세요. 이것이 그대에게 마법을 걸지 못하게 해 줄 것입니다. 키르케가 음식을 준 다음 지팡이로 그대를 치려고 할 때 날카로운 칼로 그녀를 죽일 듯이 덤벼드세요. 그러면 겁이 난 그녀가 그대를 유혹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키르케에게 그대의 동료들을 풀어 주겠다는 것과 다른 재앙과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것을 축복받은 신들 앞에 맹세하라고 하세요.”
신의 노여움을 산 오디세우스 일행은 바다에서 떠돌아다니다 어느 섬에 도착했다. 그곳은 바로 마녀 키르케가 살고 있는 전설의 섬 아이아이에(Aiaie)였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신시켜 버렸다. 부하 중 홀로 살아남은 에우릴로코스는 동료들을 버려두고 빨리 도망가자고 했지만 오디세우스는 돼지로 변한 부하들을 버려두고 도망가는 대신 그들을 구하러 키르케의 성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도와주기 위해 헤르메스(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십이신 중에 전령의 신으로 제우스와 거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났음)가 나타나 ‘몰리’라는 약초를 건넸다.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마법에 걸리지 않았고, 동료들을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홍 군을 사랑해서 결혼했다. 하지만 여러 힘든 상황에서는 사랑보다도 더 강한 감정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이 연민과 의리라고 생각한다. 10년을 함께 살면서 좋은 꼴, 나쁜 꼴 모두 보여준 사이. 부모도 모르는 나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힘들게 일을 하다 불안장애가 온 사람. 나는 그에게 연민과 의리를 느꼈다. 그건 사랑보다도 더 강한 힘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몰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