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나긴 여정의 서막
키르케 궁전 같은 격리 호텔에서 줌을 통해 상담사를 만났다. 40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분이셨다. 남편과는 이미 여러 번 상담을 진행했기에 라뽀가 잘 형성되어 있었다.
상담사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동안 말하지 않고 숨겨두었던 마음을 모두 들켜버린 것 같았다.
우울증이 심하게 왔을 때, 갈 곳이 없어 멍하니 거실에 앉아 아이를 바라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날마다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던 일도 떠올랐고, 남편이 해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홀로 한국에 남아 아이를 돌보던 일, 젖몸살이 심하게 왔지만 아이 때문에 병원에 잘 가지 못했던 일,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응급실에 다녔던 일, 남편 없이 둘째를 낳았던 일, 둘째를 낳고 이틀 만에 퇴원해 큰언니네 작은 방에서 아이 둘을 돌봐야 했던 일, 출산 후 심하게 온 변비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던 일….
그동안의 서운했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상담을 마치고 하루가 지났을 때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그냥 두었으면 조용히 수면 아래에 있었을 상처들을 상담이 헤집고 지나가니 먼지처럼 수면 위로 둥둥 떠올라 부유했다.
그중에서도 치타공에서 살았을 때의 일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내 모든 생각을 틀어 막았다.
마트에서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도 영수증을 잘 확인하지 않았던 나는 그날도 역시 수입 아이스크림 가격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들고 왔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영수증을 꼼꼼히 확인하고, 조금 비싼 물건이 보이면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날 산 아이스크림이 그의 레이다 망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당장 가서 아이스크림을 환불해 오라고 했다. 그렇게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는 건 낭비라고 하면서. 미래를 위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악다구니를 썼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영수증을 미리 확인하지 않은 나를 탓했고, 남편의 월급에 의지해 사는 나를 탓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마트에 갔지만, 아이스크림과 고기류는 환불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아이스크림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하지 못했던 악다구니를 이제야 했다.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진짜 너무 했다고, 그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그거 하나 사먹지도 못 했느냐고. 따지고 보면 겨우 겨우 만원 조금 넘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지금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미래의 아플 나를 위해 보험을 들고, 경제적으로 힘들 미래의 나를 위해 돈을 모은다. 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시키고, 그 아이들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 미래에 집중된 오늘의 삶은 너무 하찮게만 느껴진다.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자고, 조금 덜 누리고.
그러다 어느 날 하나, 둘 삐걱대기 시작한다. 미래였던 날이 현재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똑같이 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허무함이 밀려든다. 허무함은 곳 무기력을 자아낸다. 무기력은 여러 모양으로 알을 낳는다. 불안함, 우울증, 공황장애, 방탕함.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내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무기력이 낳은 알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알에서 깨어나는 형태도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키르케의 궁전에서 일년 동안 놀고 먹은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이제 다시 고향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키르케는 다시 떠나려는 오디세우스에게 앞으로 마주해야 할 어려움과 피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대들은 지금 우리가 고향으로 간다고 생각할 테지만, 키르케는 우리에게 다른 여정을 정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집으로 내려가 테베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을 만나야 합니다.”
하데스는 죽음을 관장하는 지하세계의 신이고,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아내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장님 예언자로 7대에 걸쳐 신탁을 전하고 예언을 한 사람이다. 죽음 후에도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죽음의 지하세계로 내려가 그의 예언을 들으라고 조언한 것이었다. 지하세계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기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좌절하고 만다. 다행히도 키르케의 도움으로 지하세계로 갈 수 있게 된 오디세우스의 그의 일행 앞엔 여전히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산적해있었다.
우리 안에는 테이레시아스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의 표지이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픈 현상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귀한 시그널이다. 그 시그널에 따라 멈춰야 할지, 가야 할지, 가야한다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마음은 계속 알려준다. 저 깊숙한 곳, 아무도 볼 수 없는 지하세계에 존재하는 테이레시아스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예언을 해줄 것이다.
눈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가리키는 지표를 따르는 것.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는 자기 자신의 몫이다.
내 안의 테이레시아스는 새로운 곳으로 가라고 자꾸만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