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프랑스 학교 이야기
오늘 아침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분주했다. 두 아이 모두 발표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를 선택해 팀으로 발표를 해야 하는 첫째 지안이는 친한 친구 두 명과 함께 팀을 만들어 페르세우스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친구 집에 모여 자료조사를 하고 커다란 종이에 사진을 붙이고, 발표할 내용을 적고, 서로 어떤 내용을 발표할지 파트를 나누었다.
지안이는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페르세우스의 이야기를 담당하기로 했다.
평소에 발표불안이 있는 아이인데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 준비해서 그런지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둘째 소은이는 예전에 다녔던 '델리 프랑스 학교'에 대한 발표를 영어로 준비했다. 다른 나라 프랑스 학교의 등하교 시간, 수업 내용, 방과 후 활동 등을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와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델리 프랑스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사진을 찾아보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추억했다. 얼마 전의 일인 것만 같은데 어느새 2년 전의 일이 되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발표를 준비하는 모습이 내 성에 차지 않았다. 사진 2장을 준비하고, 할 말은 종이에 대충 끼적이는 게 다였다.
"좀 큰 종이에 사진도 붙이고 글자도 좀 쓰고, 예쁘게 꾸며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내 말에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괜찮아. 큰 종이에 준비해도 되고, 이렇게 해도 돼. 나는 이렇게 할래."
밀라노 프랑스학교에서 아이들의 발표 수업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매번 팀 플레이를 하고, 토론하고 발표를 한다. 선생님이 몇 가지의 주제를 정해주는 경우도 있고, 아이들이 발표하고 싶은 주제를 직접 정하기도 한다. 친구와 함께 해도 되고, 혼자 해도 된다. 발표의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둘째 소은이네 반은 조금 특별한 발표를 한다. 굳이 선생님이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이 원하는 발표를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히드라에 대해 발표를 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뱀으로 머리가 100개, 50개, 9개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 자리에 새로 머리 두 개가 생긴다는 괴물로, 헤라클레스가 이를 죽였다고 한다. 이 발표를 위해 지안이가 히드라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에 대해, 마술에 대해 그리고 책에 대해 발표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번 영어 발표가 끝나면 다른 발표를 또 준비해야 한다. 친한 친구 한 명이 소은이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이번에는 백조에 대해 발표를 한다나....
이건 점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하고 싶은 아이들이 직접 주제를 정하고 팀을 만들어 선생님한테 말하면 선생님은 발표할 날짜만 정해 준다.
나는 발표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드는 일조차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까 봐 매 수업시간마다 긴장을 했다.
'제발, 내 번호를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
학창 시절 나의 첫 번째 기도제목이었다. 다행히도 '최'씨였기에 48번 이 내 번호였고, 한 달이 많아 봐야 31일까지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8일, 18일, 28일이 되면 여지없이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중얼중얼 기도를 했다.
'제발, 내 번호를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나이기에 아이들이 발표를 준비하는 모습이 매우 색다르게 다가온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발표를 왜 사서 하는 것일까?
내 질문에 아이는 말했다.
"친구들이 박수를 쳐주면 기분이 좋아. 발표 하기 전엔 좀 긴장이 되는데 발표를 딱 하고 나면 엄청 뿌듯해."
"어제 카푸신이 말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걔는 진짜 말을 사랑하나 봐. 주말마다 말을 타러 간데."
"엄마 리스랑 니나는 마술에 대해 발표했는데, 진짜 멋지더라. 간단한 마술을 보여줬는데 진짜 감쪽같았어."
아이들은 발표를 즐기고 있었다.
그건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애를 써서 해야 하는 발표가 아니었다.
다른 팀보다 더 잘하기 위해 하는 발표가 아니었다.
아이의 발표를 위해 부모가 나서서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이건 경쟁하기 위한 발표가 아니라 내가 준비한 것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조금 서툴더라도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인 것이었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존감 하나는 지킬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있다면, 뭘 해도 하겠지.....
오늘 학교를 마치고 만난 아이들에게 나는 똑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오늘 발표 어땠어?"
그러면 아이들은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응,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