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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n 28. 2023

15년 된 여행가방을 정리하며

글 쓰는 수요일 밤 [여행]

다음 주면 아이들 학교가 드디어 방학을 한다.

요즘 주로 나누는 대화는

"이번 여름에 어디 가니? 언제 가니? 언제 돌아오니?"

이다.

오늘도 이와 똑같은 질문을 네 번 받았고, 네 번 물어봤다. 분명히 지난주에도 똑같은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고, 똑같은 사람에게 질문을 한 것 같은데,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뭔지.


그저 할 말이 없어서 나눈 무심한 질문이 대화의 탈을 썼던 모양이다.

"여름휴가 잘 보내~"

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했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면 서로의 휴가지를 기억하며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한국에서 여름방학이 무더위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면 해외에서 여름방학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충분히 쉬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학교의 여름방학은 6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이다. 정말 다행히도 우리 학교는 7월과 8월, 두 달 동안 방학이고 9월 초에 새 학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이탈리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님은 "방학이 왜 이렇게 짧아요?"라고 말하고, 한국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님은 "방학이 왜 이리 길어요?"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름방학이 되면 밀라노 시내는 한가해진다. 다들 여행을 떠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밀라네제가 떠난 곳엔 여행객들이 들어선다. 카메라를 들고 햇빛으로 달궈진 거리를 걷고 있는 여행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너무 더운 날, 시티 투어 2층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표정은 분명 더운데 더워 보이지 않다.

여행지에서는 더위도 낭만으로 만들어 버린다.



직장과 일 때문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8월에 있을 긴 여름휴가 (2~3주간의 휴가)를 기다리며 서머스쿨에 아이들을 보낸다. 서머스쿨은 일하는 부모들을 위해 자녀들을 돌봐주는 프로그램인데 스포츠, 미술, 음악, 영어 등 다양한 기관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때문에 1년 중 사교육비가 가장 많이 든다고 한다.



우리도 이번 여름방학 땐 밀라노를 잠시 떠나 한국에 가기로 했다. 이미 1월에 비행기 티켓팅도 해두었다. 덕분에 최근 비행값보다 절반이나 싸게 구입했다.


티켓팅을 미리 하면 여행 준비도 미리미리 할 줄 알았건만,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짐을 하나도 싸지 않았다. 이번 여름휴가를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고는 겨우 여행가방을 새로 하나 산 것뿐이다.

아니, 15년 된 여행 가방을 버리기로 결심했으니, '겨우'한 일이 아니라 '드디어'한 일이라고 해야겠다.




우리 집에는 15년 된 여행가방이 있다. 네팔에서 2년 동안 봉사활동을 한 후 한국으로 귀국할 때 샀던 가방이다. 이 가방을 들고 신혼여행을 갔고, 방글라데시에도 갔고, 인도에도 갔고, 밀라노까지 왔다. 이 여행 가방을 샀을 때 나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고, 딸도 있다.

그 세월의 흔적이 가방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한쪽 지퍼 고리가 떨어져 나가 자물쇠를 채울 수가 없고, 가방 손잡이를 위로 올리면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봄, 오스트리아 여행 때 이 여행가방을 끌고 갔다.


이런 상태의 가방을 여태껏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닌 이유는, 네 바퀴가 너무 튼튼해 여태 잘 굴러가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내가 걸었던 모든 걸음에 이 여행가방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내 방랑 생활의 최초 목격자이자 동반자라고나 할까. 동고동락을 함께 한 전우애가 깊게 서려버렸다.



이 오래된 가방을 이제 그만 보내주려고 한다.

그리고 핑크색의 새로운 여행 가방에 새로운 추억과 새로운 걸음을 새겨 넣어볼까 싶다.


그 시작이 이번 여름, 한국행이라는 것에 의미를 더하고 싶다.

남편을 밀라노에 두고, 나와 아이들만 떠나는 최초의 휴가이자, 아버지의 팔순잔치를 위한 가족 모임이자, 여러 독자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새 여행가방에는 얼만큼의 시간을 담게 될까?

또 어떤 곳을 가게 될까?


새로운 여행가방과 함께 할, 앞으로의 15년이 기대가 된다.

부디 그때도 지금처럼,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기를…



본 매거진은 “글 쓰는 수요일 밤”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주제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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