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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Jun 28. 2023

4년 만에 떠난 해외여행

코로나19가 앗아간 자유 대신, 코로나19가 되찾아준 새로운 여행의 의미




남편과 결혼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신뢰'였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공수표를 날리듯 아무렇게나, 쉽게 약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인 입으로 내뱉은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꼭 지킬 수 있는 약속만을 입 밖에 꺼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나와 결혼을 하며 농담처럼 건넨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이 뱉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지 알면서도 '농담처럼'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정말로, 내게는, 그 말이 농담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신혼여행을 위해 함께 갱신한 새 여권을 수령하던 날, 남편이 말했다.


"이 여권 가득 도장들로 채워줄게. 우리 진짜 못 해도 1년에 한 번은 어디든, 해외로 여행 다니면서 살자."


그 때 나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좋아서 배시시, 웃었던 것도 같다. 무슨 집 앞 커피 쿠폰에 도장 찍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매년 해외여행을 간단 말이람. 그만큼 행복하게 즐기면서 여행하듯 살자는 거겠거니, 그 마음만이라도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농담이 아니었다. 남편은 정말 약속을 지켰다. 결혼하고서 둘이서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국내 여행을 말할 것 없고, 해외여행도 약속대로 떠났다. 덜컥 결혼 한 달 만에 임신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임신한 몸으로도, 아이를 낳고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됐다.


역마살 잔뜩 낀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이가 태어나 6개월이 되자마자,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해외여행부터 떠났다. 아이는 따로 돌잔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벳부로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가 1년에 한 번 떠나는 해외여행은, 자연스레 아이의 생일이 있는 12월로 지정되었다. (물론 12월이 아닌 때에도 해외여행은 지속됐다).






그런 우리에게 덜컥, 제동이 걸렸다. 2019년 12월, 아이 생일쯤에 맞추어 떠났던 세부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줄이야, 그때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더랬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우리나라와 전 세계를 덮쳤다. 코로나19에게 빼앗긴 일상보다 여행의 구멍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 우리가 오랜만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년 만의 비행이다. 어느덧 8살이 된 아이는 마지막으로 떠났던 세부 여행만 겨우 기억하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매우 흐리고 짧게 끊긴 장면들로만. 그게 못내 아쉽게 느껴졌는데, 막상 공항에 도착한 아이를 보자마자 아쉬운 마음쯤, 먼지 털어내듯 훌훌 털어졌다. 아이는 마치 처음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처음 비행기를 타는 사람처럼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을 황홀하게 만끽했다. 덩달아 나도 괜스레 떨리고 설레는 여행길이었다. 2박 3일, 일본 후쿠오카 시내로 떠나는 소소한 이 여행에 심장이 소란을 피웠다.






오로지 아이만을 위한 일정으로 채운 여행이었다. 평소 포켓몬스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아이는 포켓몬스터가 만들어진 일본이라는 국가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였다. 매일 밤 호텔 침대 위, 도롱도롱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아이를 사이에 두고 어마어마한 피로에 찌든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 날의 사진들을 정리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살면서 떠난 그 어떤 여행보다 분, 초 단위로 쪼개어 알차게 보낸 여행 같다고. 패키지 상품으로 여행을 떠났어도 이보다는 덜 빠듯한 일정이었을 거라고.  


돌아보면 이전까지의 여행은 나름 아이를 고려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우리의 욕구가 좀 더 반영된 여행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고 나서 다시 여행을 복기했을 때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늘 '아이'뿐이었다. 아이가 있는 배경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고, 기억에 짙게 남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머릿속에 기록되었다. 다른 가족이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유가 흘러넘치는 일정 속에서도 마음만은 무던히도 바쁜 여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아이와 내가, 아이와 남편이, 아이와 우리 부부가 함께 있었다. 정말 알차게 하루를 소진했음에도, 마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여유가 흘러넘치는 여행이었다. 비로소 아이가 우리의 진정한 여행 메이트가 되었다. 오로지 '아이'만 남았던 여행에서 '우리'가 고스란히 남는 여행으로의 변환점을 맞이한 듯하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전부터, 아이는 벌써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차곡차곡, 아이의 추억이 시나브로 쌓이는 모든 순간들에 함께하는 일은 생각보다 행복했다. 아이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이고 있을 우리를 그려보는 것도 퍽 즐거웠다.   


지난 4년 간 쭉, 동일한 템포로 해외여행을 다녔더라면 이처럼 확연하게 우리의 변환점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이 이른다. 코로나19가 앗아간 자유가 무작정 원망스럽기만 했는데, 돌아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다. 하나를 잃는 게 있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니까. 빼앗겼던 4년 공백의 아쉬움을 한 번에 채워주기라도 하듯 충만하게 채워진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의 추억은 또 우리의 다음 여행이 다가오기 전까지 일상의 따스한 자양분이 되어주리라. 


"우리, 앞으로 자주 다니자. 도장 예쁘게 많이 찍자, 알았지?"


남편이 내게 했던 말을 빌려, 농담처럼 아이에게 약속을 건넸다. 그 약속이 무슨 의미인지 아마도 잘 모를 텐데, 그 언젠가의 나처럼 아이가 수줍고 화사한 웃음으로 답한다. 아아, 그 시절, 우리 남편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발끝부터 간질간질, 마음이 부푼다. 벌써 내 마음은 비행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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