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가족이 가족 여행을 처음 간 건 2010년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7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두 분 다 병상에 있었기에 자리를 비우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에 우리에게 여행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가족 여행은 드라마 속 이야기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언니와 내가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면서 친정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가 누구보다 성실하게 삶을 꾸려나간 덕분이었다.
아빠, 엄마 50대 초반, 언니 30대 초, 동생 20대 초, 나 20대 후반이 우리 가족의 첫 가족 여행이었다.
그때 어떻게 해서 여행을 가게 된 건지는 생각 나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 남동생, 언니와 형부, 조카, 그리고 나와 남편까지 8명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내가 결혼하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뒤로 엄마는 종종 가족 여행을 가자고 했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매해 한 번 이상 가족 여행을 갔다. 함께 다녔던 여행지를 기록으로 남겨놓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러질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남겨 두어야겠다.
여행을 가자면 첫 번째로 서로 시간이 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돈.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시간을 일 번으로 놓아본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0순위는 마음!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힘들다. 특히 1박 이상의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가족 여행을 하면서 느꼈다. 1박을 했을 때는 서로 아주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작년, 처음으로 3박 4일로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한 공간에 3박 4일 동안 친정식구들 모두 함께 지냈다. 엄마, 아빠, 언니네 세 식구, 우리 네 식구, 동생네 두 식구, 합 11명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차 두대를 렌트해서 다녔다. 신랑과 내가 엄마, 아빠를 모시고 다녔고, 나머지 일행은 카니발에 함께 타고 이동했다.
엄마는 다리 수술을 하고 회복이 느린 탓에 많이 걷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최대한 걷는 것을 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힘에 부쳐하셨다. 그리고 식당을 갈 때마다 불편한 내색을 하셨다. 엄마 지인들과 함께 여행했을 때와 끊임없이 비교를 했다. 자식들이 계획한 일정이 아무래도 성에 다 차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린 최대한 엄마에게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부지런함을 우린 따라갈 수 없었고, 집에 올 때쯤 나는 지쳐있었다. 잘 헤어지긴 했지만 그때 나는 '아 피곤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부모님이 우리 보다 더 힘드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세야 든다. 한 공간에 오래 함께 머무른 다는 건 서로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서로의 생활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행 경비 부분에서 엄마가 100%로 부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언가 할 때 자꾸 엄마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밥 먹을 때. 언니랑 내가 식비를 보태려고 했지만 싸인이 제대로 맞지 않아 식비를 모아 온 카드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 뒤 1년 후, 올 6월에 3박 4일로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왔다. 이번에도 엄마가 경비를 100%으로 부담하셨다.
여행은 엄마가 항상 선동하셨다.
"엄마가 돈 다 낼 테니깐 너희들은 시간만 맞춰! 언제 갈까?"였다. 제주도 갈 때까지 적극 적였던 나와 언니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 갈때는 언니네는 슬쩍 빠졌다. 사실 나도 슬쩍 빠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리 딸들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모르 척할 수가 없었다. 결국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왔다.
엄마가 여행 경비를 대는 비용이 처음에는 백만 원, 그다음엔 이 백만 원 그러더니 이제는 천 단위로 올라가고 있다. 그럴수록 엄마에게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는 더 커졌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엄마를 잊었다. '엄마는 어른이니깐 동시에 엄마는 내 엄마니깐'이라는 무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자기를 챙기지 않아서 서운해했고, 여행 막 빠지에는 삐져서 토라져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코타키나발루는 외국이었기에 의사소통도 불편했을 거고, 돈 쓰는 것 또한 불편했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식들에게 의지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남동생과 나의 챙김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는 엄마가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난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챙기다고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번 여행이 참 좋았다.
바다에서 페어세일링을 했다. 보트에 낙하산을 달고 보트가 달리면 낙하산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 체험이다. 페어세일링을 하며 하늘에 붕 떠서 경치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삶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유년기 시절이 말이다. 그때는 지금 같은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가족여행을 하는 것도 상상 못 했는데, 이제는 해외여행까지 할 수 있다니! 거기다 가족들이 시시때때로 모여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서로의 생일을 챙기며 축하를 할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상상 속에서만 아니 상상 속에서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런 아름다움을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다. 이 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손을 흔드는 엄마, 아빠에게 감사함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키워주신 것도 너무 감사한데 여행까지 데리고 와주시는 부모님. 성인 된 우리가 모시고 와야 하는데, 아직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우리가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다음에는 우리가 꼭 모셔야지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 우리 삼 남매에게는 경제적인 가난보다 마음의 가난이 심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병상에 누워있었기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재를 장남인 아빠, 엄마가 삼촌과 고모들에게 부모의 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애썼야했다. 더불어 장남이라는 자리에서 아빠와 엄마가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집은 늘 분주했고, 어수선했고, 싸움터가 되기로 했다.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음속에 가난함을 만들었다.
엄마가 여행 경비를 다 내어가면서, 몸이 힘들면서도 자꾸 여행을 가자고 하는 이유는 어쩜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때 힘들었던, 그때 우리를 꼭 끌어안아주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는 생각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기에 중간중간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음을... 나는 엄마의 그 마음을 알아주고 감싸주고 싶은데, 그 상황에서는 쉽지가 않다. 꼭 뒤돌아와서 후회를 한다. 엄마를 좀 더 챙겨줄걸. 좀 더 엄마 입장에서 생각할 걸 하고 말이다.
나이 마흔이 넘어도 엄마는 나에게 여전히 엄마인 것인지. 엄마에게 챙김을 받던 관성을 벗어서 엄마를 내가 챙겨야 한다는 관성으로 넘어기가 어렵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느끼며 생각할수록 변할 수 있을 거라 믿어본다.
엄마에게 여행은, 성인이 된 자식들의 유년기를 감싸 안아주는 마음이자, 그때의 힘들었던 자신을 안아주는 행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