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영
준영은 현수가 잠든 걸 확인하고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어제가 마감 날이었는데 글을 보내지 못했다. 쉬는 날이라서 글을 쓸 여유도 많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현수와 돈가스를 먹다가 김 간호사님과 사해를 만나는 바람에 함께 커피까지 마시게 된 것이었다. 절대 만날 일 없을 줄 알고 자신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모두 털어놓았기에 준영은 퍽 민망했다. 사해는 현수가 너무 귀엽다며 현수 옆에 딱 붙어 앉아있었고, 현수는 작은 가방에서 로보카 폴리 자동차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사해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사이답지 않게 꽤 친해 보였다.
김간호사님과 사해는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라고 했다.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꽤 친하게 지냈는데 김 간호사님은 병원 간호사로, 사해는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각자의 길을 갔다고 한다. 물론 준영과 사해는 온라인 글방에서 나누었던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김간호사의 수다와 현수의 귀여움이 민망하고 어색한 시간의 틈을 메꿔주었다.
그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와서도 준영은 글을 쓰지 못했다. 사해와의 만남의 여운이 길게 남아 있어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마감을 넘기고 말았다. 오늘은 꼭 글을 써야 내일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준영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어제 현수와 함께 먹었던 돈가스를 떠올렸다.
[꿈꾸는 돈가스 :
나는 한때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가 되고 싶었다.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손님들이 들어서면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또깍 또깍 구두 소리를 내며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코스요리를 시킨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요리가 아니라 매너와 허세 사이를 넘나들며 쓱싹쓱싹 마음껏 여유를 부리며 먹는 음식. 특별한 날의 특별한 음식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스테이크가 되고 싶었다.
나는 한때 왁자지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식당의 삼겹살이 되고 싶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 슬플 때 먹으면 기쁨이 되어주고, 기쁠 때 먹으면 기쁨이 배가 되어주는 그런 음식.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삼겹살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돈가스가 되었다.
내 진짜 모습을 튀김가루 속에 숨긴다. 나의 욕망 또한 기름에 바싹 튀겨 날린다. 날것의 내 모습은 사라지고, 두툼하게 옷을 입은 돈가스로 다시 태어난다. 그건 고기의 맛도 아니고 튀김의 맛도 아니다. 그건 동그란 모양도 아니고 네모 모양도 아니다. 특별한 맛도, 모양도 없는 돈가스는 그냥 살아간다.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취향도 없이 잠을 자고 일어나고 일을 하고 다시 잠을 잔다.
이런 돈가스에게도 희망은 있다. 평범한 맛, 평범한 모습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평범한 날, 가장 편한 옷을 입고, 가장 편한 사람들과 먹을 수 있는 음식.
함께 먹을 사람이 없을 때 혼자 먹어도 절대 눈치 보이지 않는 음식.
준영은 여기까지 글을 쓰고 더 이상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번엔 마감도, 원고 제출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일 모임은 빠질까....'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난 항상 이모양이지 뭐.... 지민이가 떠난 것도 이해가 가. 내가 이렇게 비겁하니까 지민이를 잡지도 못한 거잖아. 휴....'
준영은 고이 잠든 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내 삶은 이렇게 엉망이지만 현수를 포기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준영은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아무 말 대잔치라도 원고를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글을 포기해 버리면 다시는 자신의 삶에 완성이란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겐 특별한 취향이랄 게 없다. 예전엔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취향은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 되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말고, 당신이 먹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말고, 당신이 하고 싶은 것. 어쩌면 이게 우유부단함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살면서 딱 한번, 내가 정말 원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던 게 있다. 바로 현수다.
현수는 나에게 기쁨이고 고통이다. 현수는 나에게 희망이자 절망이다. 현수는 내 꿈이자 좌절이다.
나는 현수를 선택함으로써 그 외의 것들을 모두 포기했다. 이제 난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내 꿈을 좇고 싶은 욕망을 현실이라는 기름에 튀겨 날린다.
친절이라는 옷을 두껍게 입고 까불거리던 내 진짜 모습을 감춘다.
나도 돈가스처럼 희망을 가져도 될까?
새로운 꿈을 꿔도 괜찮을까?]
'준영 님, 글 잘 읽었습니다. 혹시,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 아시나요?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플랫폼인데요 블로그와 비슷하지만,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해서 합격을 해야 글을 쓸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브런치 작가가 되어 차근차근 준영 님만 쓸 수 있는 글을 써보셨으면 좋겠어요. 분명, 많은 분들께 울림이 있는 글을 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준영 님을 통해 싱글대디의 삶이 음지에서 양지로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준영이 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쯤 후에 작가님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한국은 밤이지만, 밀라노는 아직 낮이라고 했다. 준영은 작가님의 메시지를 받고 바로 브런치를 검색해 보았다. 그곳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글을 쓰고 있었다. 준영은 가끔 블로그에 글을 끄적이긴 했지만, 자신의 블로그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준영은 자신이 쓴 글처럼 희망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래야 현수에게 떳떳한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수에게 엄마가 없는 것은 현수의 잘못이 결코 아님을, 그건 어른들의 잘못임을, 그리고 현수 때문에 아빠가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 작가님.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준영은 작가님께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