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
"다들 잘 지내셨어요? 밀라노는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했어요. 완연한 봄이네요."
"밀라노와 한국 날씨가 비슷한가 봐요. 여기도 이번주부터 갑자기 더워졌거든요."
"하이고 마 통영은요 남쪽이라서 더 먼저 덥다 아입니까. 이러다 곧 여름 오지 싶어요."
"저희가 벌써 함께 글을 쓴 지 3개월이 다 되어 가네요. 정말 시간 빠르죠?"
"그러게요.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흐르네요."
"지난번에 제가 제안드렸던 건 생각 좀 해보셨어요?"
"어... 저는 한번 해보고 싶어요. 책 쓰는 게 쉽진 않겠지만, 멤버들랑 작가님 함께라면 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요.... 작가님 덕분에... 브런치 작가도... 됐고, 저도... 음... 이제 좀 다른 글.... 독자를 위한.... 글 그런 거... 써보고 싶어요...."
"저는...."
사해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저는.... 휴직 3개월 더 연장했어요.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요. 아마 2학기 때 복직할 것 같은데 새로운 학교로 발령이 날 것 같아요. 그래서 좀 고민이 되네요. 새 학교에 가면 또 새롭게 적응해야 할 것 같고요..."
"네네. 강요는 아니에요. 하고 싶은 분들만 하시면 됩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은영 님께서 표지 디자인을 해준다고 하시니 든든한 걸요?"
"네. 작가님 지도 생각을 쪼매 더 해볼게요. 아무래도 마... 지는 책 쓰기가 영 자신이 없네요. 일단 글쓰기라도 잘좀 해볼라꼬요. 제가 하도 불량학생이다 보니...."
경미의 말에 다들 웃음을 지었다.
오늘따라 오프닝부터 다들 말이 많았다. 은영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투, 억양, 습관 등을 귀담아들으며 그 사람의 얼굴과 연결시켜 보는 일은 은영이 즐겨하는 놀이에 가까웠다.
"은영 님 새벽에 일어나기 힘드시진 않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경미님은 미라클 모닝 잘하고 계세요?"
"그럼요, 그럼요. 이제는 저도 습관이 딱 됐는가 새벽 5시만 되믄 눈이 번쩍 떠진다 아입니까. 근데 일찍 일어나도요 정신 안 차리믄 시간이 후딱 가버리데요. 그래도 이리 글이라도 쓰고 있어서 뭐라도 남겨놓고 있다 아입니까, 참말로. 아 그라고 저희 펜션 리모델링 했으니까네 혹시라도 통영 올 일 있으믄 놀러오이소."
"저요, 저요! 저희 다음 달 휴가 때 남쪽으로 여행 가려고 하는데 가도 될까요?"
선미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하이고 동상이 온다믄 내 두 팔 벌려 환영이지요. 꼭 오세요. 꼭이요."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 것일까? 온라인이라는 세계는 참으로 희한하다고 은영은 생각했다.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온 은영이 다시 한국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 이유도 바로 이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자신도 한번 살아 볼 용기가 날 것도 같았다. 문제는 제이지만.....
"자, 오늘은 누가 먼저 낭독을 해볼까요?"
"제가 먼저 할게요."
은영은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은영 님 글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은영은 워드를 열고 자신이 쓴 짧은 글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희망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바로 희망이다.
은영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고개를 들었다. 멤버들의 환한 미소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은영 님, 정말 정말 감동했어요. 저 정말 눈물이 찔끔 났지 뭐예요."
선미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와... 마지막 문장이.... 와....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희망이라니....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어요... 그전에도... 느꼈는데 은영님 문장은 진짜.... 예술 같아요. 한 폭의.... 뭐랄까.... 그림 같아요."
"어휴, 아니에요. 여기 멤버들 마음이 다들 따뜻해서 글도 그렇게 들리나 봐요. 분량이 너무 짧아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기에 내 이야기를 더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런데 자꾸 내 이야기를 쓰다 보니 내 삶에 대한 변명처럼 보이는 거예요. 사실 전, 음...."
갑자기 은영은 목이 메었다. 변명 같은 글은 절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어쩔 수 없었다는 넋두리를 쓰는 것 같았다. 분명히 선택을 했던 모든 시간들이 진심이었는데, 그 진심은 오로지 자신만 아는 비밀이었다.
"말씀 안 하셔도 알 것 같아요. 은영 님. 해외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전 밀라노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데도 힘든 걸요."
"은영 님 정말 존경합니다. 저는 도저히 혼자서는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서 어머니 댁에 함께 사는걸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아이도 없고 키울 건 저 자신 하난데도 너무 힘들어요."
사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이고 마,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여도요, 실상은 다들 다~ 힘든 기라요.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능교? 안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런 글방 찾지도 않을 끼라요. 지들 잘난 맛에 살지요."
"맞아요, 뭔가 결핍이 있으니 이런 곳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마음이 좀 여린 사람들이 오프라인 보다 온라인 모임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경미의 말에 선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희망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느낌이 미래지향적인 느낌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희망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내포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희망은... 음..... 미래... 완료 진행형이 아닐는지...."
준영의 말을 들은 은영은 잊고 있었던 명언이 하나 떠올랐다.
"The only limit to our realization of tomorrow will be our doubts of today"
내일을 실현하는 데 유일한 한계는 오늘에 대한 의심뿐이다.
결국 희망의 의미가 현재를 내포하는지, 미래를 내포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늘을 의심하지 않고 충만하게 살 때 바로 내일이라는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감사해요, 다들. 그리고 준영 님. 말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감사해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고민이 참 많았거든요. 물론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는데, 준영 님의 말을 듣고 보니, 고민은 하되 걱정은 하지 말아야겠어요. 저는 오늘을 의심 없이 살고 있으니, 내일에 대한 기대도 가져보고 싶네요. 그게 희망인 거겠죠?"
은영의 말에 다들 박수를 쳤다.
은영은 데이비드에게 먼저 연락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휴가 때는 한국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의심하지 말고 선택해 봐야겠다고 은영은 생각했다.
"자, 그러면 이번까지 선량한 글방 시즌 1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시즌 2는 함께 책을 쓰는 작업을 할텐대요, 미리 공지 드렸던 것처럼, 함께 책을 쓰실 분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시간이 안 되시거나 부담되시는 분들은 꼭 안하셔도 됩니다. 한 달 쉬었다가 선량한 글방 시즌 2 다시 시작할게요."
"네, 작가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따로 오프 모임 없지요?"
"네. 없어요. 제가 만약 한국에 가게 된다면 그때나 한번 뵐까요? 근데 언제 갈지 모르겠어요."
"뭐, 괘않습니다. 언젠간 볼 날이 있겠지요."
"다들 좋은 밤 되세요. 은영 님은 좋은 하루 되시고요."
"네, 다들 안녕~"
컴퓨터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선량은 오른쪽 아래 빨간색으로 된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이내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흐흠~ 휴~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이들 픽업 시간이 다 되었다. 부리나케 노트북을 닫고 열쇠와 핸드폰을 들고 아이들 학교로 향했다.
작가의 세상에서 엄마의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