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희망은 미래형이 아니다

은영

by 선량


"제이야 우리 한국 가서 살까?"

"커몬~ 맘~ 또 그 소리야? 난 싫어."

"왜 그렇게 싫은데?"

"my home is here. 내 친구들이 다 여기 있잖아. 한국엔 친구도 없고, 한국 학교는 너무 힘들어."

"하지만 한국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잖아. 네 아빠도...."

"데디?? what the f*** dady? 나한테 아빠가 어딨어? 암튼 난 싫어. 갈 거면 엄마 혼자 가."


휴.... 은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에게 한국행 말만 하면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한다. 캐나다에서 10년을 산 제이는 이미 캐나다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영은 여전히 한국 엄마였다. 그 사이의 격차는 좁히려야 좁힐 수가 없었다. 딸은 점점 더 독립적으로 자랐지만, 은영은 예전에 부모님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보수적인 엄마였던 것이다.

그때 제이가 짧은 티셔츠에 짧은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야, 너 그러고 어디 가니? 치마가 너무 짧은데?"

"엄마 나 제이슨 만나러 가. 바이~"

"너무 늦지 마~"

"okay~"

"휴~~~ " 은영은 한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은영은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집에서는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을 것 같아 공원으로 나가 볼 참이다.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향했다. 5월의 햇살이 꽤 뜨거웠다.

봄이 되면 밴쿠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온몸에 햇살을 벌겋게 저장한다. 그리곤 추운 계절 내내 그 햇살을 야금야금 꺼내어 쓴다. 처음엔 그들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은영도 그들 사이에 합류하여 햇살 아래 몸을 누이고 햇살을 모은다.

오늘은 주말이라 공원에 가족들이 많이 나와있다. 은영은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커피가 담긴 텀블러와 노트북을 꺼내 돗자리에 내려놓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 한 줌이 내려와 은영의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은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나뭇잎에 부딪히는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좋다...

지금까지의 모든 걱정이 나른함 뒤로 물러나고 오직 지금 이 시간을 감싸는 공기만 남았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걱정, 월세에 대한 걱정,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 대한 걱정, 제이의 학업에 대한 걱정, 요즘엔 제이의 남자친구에 관한 걱정,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결론 없는 걱정들.

다른 사람들에겐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걱정 보따리였다.

공원에 옹기종기 모여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엔 걱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저들에게도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걱정이 있을 것이다. 평화롭게 나른한 이 느낌에서 은영은 희망을 느꼈다.


'희망이 별 건가, 지금 이 느낌이 희망이 아니면 뭐람. 어? 이거 괜찮은데?'


은영은 희망에 관해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창한 희망은 쓰고 싶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너무나도 막연해서 그걸 붙들고 현재를 사는 건 은영에게 거짓된 삶처럼 느껴졌다. 은영은 지금이 시간,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내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제목: 희망은 미래형이 아니다.

제이와 함께 밴쿠버에 온 지 10년이 되었다. 어떤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현실도피에 가까웠다. 더 이상 어느 곳에도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캐나다를 떠올렸다. 삶은 어떤 희망보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가득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희망을 품은 채 뜬구름 잡듯 살기보다는 내 발로 직접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무모함을 선택했다.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다가오는 문제의 도형을 가장 알맞은 자리에 맞춰 끼우면 저 심연에 있는 문제가 한 칸씩, 두 칸씩 사라진다. 그러면 뭔가 문제를 해결했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런데 최근엔 빠르게 내려오는 도형을 제자리에 맞추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쌓이고 쌓여 내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지금의 내 삶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에 유턴을 하든지, 방향을 바꾸던지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만큼의 무모함이 별로 없다. 무모함을 좋은 말로 하면 용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지금 타운의 작은 공원, 커다란 나무의 그늘 아래 앉아있다. 이 나무는 10년 동안 나에게 기댈 수 있는 등을 내어주었다. 어린 제이를 데리고 밴쿠버로 막 왔을 때도, 제이가 자라 초등학교에 갔을 때도, 내가 드디어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이 나무는 매번 나에게 등을 빌려주었다
눈을 감고 나무가 나에게 하는 소리를 들어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의 소리,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 그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는 소리.
저 멀리에서 아이가 웃는 소리, 어느 집 아빠의 놀라는 소리, 자전거 페달 소리와 공놀이를 하는 소리.

내가 애써 문제의 도형을 끼워 맞출 필요 없이, 그저 잠잠히 있어도 괜찮다고, 나무는 말하는 것 같다.
이상하게 그 소리들이 희망으로 들렸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어느 미래를 위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움직이는 사람들,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편안함.


은영은 여기까지 글을 쓰고 잠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작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영 님의 글은 참 감각적인 것 같아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비유를 잘하시는 것 같아요. 뭐랄까.... 산문시 같다고나 할까요? 디자인 일을 하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게 은영 님 글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너무 감각적인 표현이 많다 보니 정작 은영 님 개인적인 서사가 부족한 느낌이랄까요. 아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이런 감각적인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으니까요. 그 부분을 부각해도 좋을 것 같아요. 단지 저는 은영 님의 진짜 이야기가 듣고 싶었어요.'


감각적인 내 글을 더 부각할 것인가, 작가님의 말 대로 내 이야기를 더 써야 할 것인가. 은영은 자신의 글에 대한 갈림길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은영?"

은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데이빗이었다. 은영이 결혼 전 유학생활을 했을 때 꽤 가깝게 지낸 친구 중 한 명이다. 그땐 분명히 머리숱이 풍성했었는데, 가운데가 훤히 드러난 걸 보니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헤이, 데이비드. 와 진짜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내?"

은영은 그를 만나니 다시 20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와우, 정말 은영이구나. 긴가민가 했어. 넌 그대로구나. 그때 한국 들어가지 않았어?"

"어, 들어갔다가 10년 전에 다시 왔어. 넌 어때?"

"아 난, 보시다시피"

데이비드는 손에 든 공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가족이랑 함께 왔구나."

"음, 아니 아들이랑 나왔어. 내 아들 저기~ 사이먼~"

데이비드는 아들을 부르더니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 난 3년 전에 이혼하고 아들이랑 둘이 같이 살아. 지난달에 이쪽으로 이사 왔지. 와이프는 이혼하고 몬트리올로 갔고. 사이먼은 주말에만 나랑 함께 지내고 있지. 넌 어때?"

"아 나는....."

은영은 자신의 아픔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곳 사람들이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이나라 사람들에겐 이혼이 아픔이 아니라 결혼 후 여러 모양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데이비드 덕분에 은영도 용기를 내보았다.

"응, 나도 이혼하고 딸만 데리고 여기로 왔어. 딸이 벌써 미들스쿨에 다니고 있지."

"와우, 너 정말 멋지다. 예전에도 멋졌지만. 네가 한국 가버려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그때 내가..."

"헤이, 대디~"

"아, 오케이, 곧 갈게~ 암튼 연락할게. 연락처 좀 줄 수 있니?"

"응? 아 그래."

은영과 데이비드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아들을 향해 뛰어가는 데이비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영은 다시 사십을 바라보는 아줌마로 돌아왔다.

편안했던 마음에 작은 파구가 생겼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싸르르한 느낌이 은영의 몸을 감쌌다. 그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어느 미래를 위한 희망 같았다.


희망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바로 희망이다.

은영은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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