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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Nov 01. 2023

2. Come stai?(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다)

La vita è bella! 인생은 아름다워!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의 더위가 갑자기 꺾였다.

분명 지난주만 해도 낮 기온이 25도를 웃돌았는데, 오늘은 15도 이하이다.


단 하루 만에 계절이 확 바뀌면서 거리에 사람들의 옷차림새도 급격하게 변했다. 짧은 반바지와 크롭 티, 끈 나시가 사라지고 부츠와 패딩이 등장했다.

나는 10월 첫 주에 미리 준비해 놓은 니트를 꺼냈다. 아이들에게도 후드 잠바와 패딩을 입혔다. 1년 만에 훌쩍 커버렸는지, 잠바 소매 밖으로 딸아이의 팔목이 댕강 보인다. 일단 오늘은 어설프게라도 가을을 맞이해야겠다. 이렇게라도 가을을 준비한 나를 보니 새삼 대견했다.

스산한 밀라노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2년 전 밀라노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날씨가 딱 지금 같았다.

햇살 한점 보이지 않는,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언제 비를 토해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밀라노에 오기 전 이곳 날씨를 여러 번 검색해 보았다. 여름엔 건기라서 비가 잘 안 오고, 겨울엔 우기라서 비가 많이 오고 습하다고 했다.


봄과 가을은 건기도 아니고 우기도 아니니 가장 좋은 계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중충한 밀라노를 마주한 순간,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걸 알았다.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앞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예상 밖의 일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밀라노에 도착한 이후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밖에 나가 유럽의 거리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인도의 무더위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는 그 스산한 공기가 뼈가 시리게 추웠다. 한국의 가을만 생각하며 얇은 잠바만 준비했던 우리는 예상치 못한 차가운 공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숙소에서 얇은 이불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누워있으면 8시간의 시차와 낯선 공기의 노곤함으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내가 밀라노의 가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흐리멍텅하게 지낼 때 남편은 과연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를 헤아렸다. 막연하게 인도에서 일하는 것보다 이탈리아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마음으로 왔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인도와 이탈리아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밀라노로 오는 공항에서 느꼈던, 뭔가 익숙하면서도 당황스러운 그 느낌적인 느낌이 남편의 일터에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식물적 인간’이다. 식물처럼 주기적으로 햇빛을 받고 광합성을 해야만 살 수 있어서 하루에 한두 번은 꼭 햇빛 아래에서 산책을 해야 한다.


무더위의 끝판인 나라, 인도에서도 그는 산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땀을 흘리면서도, 모기에 뜯기면서도, 미세먼지 수치가 300이 넘어도 그는 햇빛만 있으면 산책을 했다. 산책은 그에게 호흡이자 생명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우중충한 날씨에 그와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밀라노에 온 것이 잘한 선택인지 끝도 없이 되물었고, 과연 여기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헤아렸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

인도에서 밀라노로 이사하면서 생긴 3개월의 공백기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나와 함께 홈스쿨링을 했다.

아이들을 집에서 직접 가르치는 동안, 정말이지 나는 홈스쿨링과 어울리지 않는 엄마라는 사실만 잔뜩 깨달았다.

이제 그만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 큰 두 아이를 품고 있을 여유가 내 안엔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밀라노와의 첫 만남은 내 남편을 닮았다.

슬리퍼를 찍찍 끌고 들어오던 그를 보며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노랗게 염색한 긴 머리 사이로 큐빅 박힌 귀걸이가 반짝였다. 반항아의 모습으로 건들거리는 그를 보며 아직 덜 자란 동생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랬던 그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난 연애할 생각이 없어’라는 말로 보기 좋게 포장해서 돌려주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정말로 어쩌다 보니,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고 여기까지 왔다.

이건 우리의 destiny,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밀라노의 첫인상도 마찬가지였다.

밀라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일단 오긴 왔는데, 이 정도로 마음이 힘들 줄 몰랐다. 새로운 나라에 오면서 그 나라의 언어도, 문화도 미리 공부하지 않고,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와버린 나의 무성의를 오랫동안 후회했다.



이탈리아로 잠시 여행 온 여행자의 마음과 이탈리아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자의 마음은 꽤 많이 다르다.

여행자들은 여행에 들인 돈과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것들만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곳에서 직장에 다니며 실적을 내보여야 하는 사람에게 이탈리아의 복잡하고 느린 시스템은 복창 터지는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영어가 조금이라도 통하는 여행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일상의  영어조차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첫인상과 다르게 밀라노가 점점 더 좋아진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행정은 너무 느려서 아직도 ID카드를 받지 못했지만, 이런 어설픔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고나 할까.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이제는 오히려 즐길 줄 알게 된 것도 같다.




우리는 첫인상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 학부모 모임에 나갈 땐 무시당하지 않으려 한껏 꾸미고 나간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명품백을 학부모 모임에 나가기 전엔 하나 마련해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축 쳐진 눈꼬리 때문에 너무 착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은 부탁하기 좋은 사람, 뒤통수치기  좋은 사람, 사기당하기 좋은 사람, 보이스피싱 당하기 좋은 사람의 대명사이다.

심지어 내 이름도 선량이라서 외모도 이름도 극하게 착하다.


나는 개무시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아이라인’과 ‘스모키 화장’을 선택했다. 사실 이렇게 화장을 해도  너무 진해서 점점 내려앉고 있는 쌍꺼풀 때문에 절반이  접혀버리지만, 절반이라도 쌔보이길 바라며 화장을 한다.

이렇게 화장하는 날 보며 아이들은 “일진”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나는 생긴 것과 다르게 한번 보고 별로라고 생각되면 뒤돌아보지 않고 갈길 가버리는, 매정한 사람이다. 나에게서 마음을 거둔 사람에게 절대 매달리지 않는다.

 과거의 남성들과 헤어질 때도 그랬다. 한번 마음을 접으면 냉철하게 다시 꺼내지 않는 사람. 미련도 후회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도 장소도 나를 반겨주지 않는 것 같으면 나 역시 마음을 접어버리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며 서로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지 못했다.


 덕분에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 밀라노에 사는 동안 이런 내 성향이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라는 걸 깨닫는다.




밀라노에 처음 왔던 2년 전의 10월이 울컥하도록 시리고 낯설었지만, 며칠 후 짠~하고 선물처럼 해가 났다.

햇살을 머금은 빗방울이 반짝거리는 거리는 눈이 부셨고, 해와 비와 바람이 머무는 중세시대의 건물 사이로  단풍잎이 나부끼는 풍경은 현실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새 학교에 갈 걱정도, 남편이 새로운 직장에서 일할 걱정도, 우리의 비자 걱정도 모두 잊어버렸다.


2년 전의 밀라노, 가을.



길거리 장터에서 파는 점퍼와 부츠를 사서 입고 밀라노의 10월을 당당하게 걸을 때 나도 이제 밀라네제가 다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알아듣는 말은 “Ciao 안녕”과 “Grazie 미안해요” 뿐이었지만, 나는 천천히 느린 사람이 되어 이곳의 거리를 걸었다.


흐린 날이 계속되다가 오랜만에 해가 나는 날이면 모두들 풀밭에 앉아 식물적 인간이 되어 광합성을 한다. 나 역시 유유히 그들 사이에 앉아 온몸에 햇살을 저장한다. 그리곤 다시 진한 에스프레소 향을 맡으며 일터와 가정으로 들어가 웃고 떠드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같은 곳에서의 아침과 오후.



단 한 번의 인상으로 모든 걸 결정해 버리는 오만함이라니,

보이는 것은 겉치레일 뿐, 진실은 그 안에 숨어있는 네 번의 계절인 인 것이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엔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만 들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와 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여기를 떠나면 차갑지만, 쨍한 공기가 그리울 것 같아. 그리고 봄의 따스함도.”


진짜 밀라노를 알려면 봄과 가을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우리의 지난가을,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다시 돌아온 가을을 떠올렸다.


이제야 첫인상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겠다. 그건 사랑의 감정뿐만 아니라 미움의 감정도 얽히고설켜 피어나는 애증이었다.

그건 12년을 함께 산 남편에게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애증이야 말로, 긴 시간 동안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가장 고도의 감정인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밀라노에서 애증의 마음으로 지낸 나에게 이제야 안부를 전한다.


Come stai? (꼬메 스따이?) 어떻게 지내?

Benission! (베니씨모?) 난 엄청 잘 지내!





이방인의 가을

 -선량-


누군가의 말이 하나의 언어로 다가올 때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

이상하게도 자유를 느꼈다.

재잘거리는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고요함 속에 있었다.


비로소 낙엽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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