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살, 자해에 대한 민감한 언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새벽. 3시 38분. 반쯤 자다 일어나 베란다 창틀에 앉아 난간을 붙들고 있노라면 언제나 톡 하고 뛰어들고 싶다. 손에 무언가 잡히지 않을 때, 허공에 오롯이 나쁜 일 때가 되어서야 지금 나를 구해준다면 새 삶을 살리라 다짐하겠지만. 그렇게 멍청한 생각까지 해가며 후회할 걸 알지만 뛰어들고 싶다. 뛰어들고 싶어.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어 대며 노래를 불렀다. 결국 눈물이 흐른다. 결국은 울고야 만다. 뛰어들고 싶은 밤은 담담할 수 없다. 지독히도 나를 울려버린다. 노래와 함께 눈물도 그친다. 얼어붙은 발가락을 오물거리고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거친 바람에 지친 몸은 쉽게 잠이 든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평안하게 새로운 하루가 온다.
내가 외로움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던가? 한번 찾아오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게 만드는 그 외로움 말이다. 외로움이라는 녀석은 공허가 된다. 핸드폰의 전원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꺼지는 순간, 공허는 무거운 쇠공이 되어 마음과 몸을 함께 끌어내린다. 곧게 뻗어나가는 궤도로 그렇게 아래로 돌진한다. 공허의 짧고 강력한 순간의 추락이 끝나면 지나간 자리로 무의 진공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구멍의 끝, 그러니까 결국에 그 쇠공은 우주의 블랙홀 마냥 모든 것을 삼키다 못해 스스로마저 없애버린 것일 테다. 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자이로드롭이 하강하는 순간처럼 마음의 눈을 감고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짧은 고통과 역겨움의 시간이 지나가는 상황을 참는다. 현실에서의 자이로드롭이 하강 후 잠시의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내린 후에도 그 잔해가 심장박동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쇠공의 추락에도 잔해가 있다. 그래서 그 불쾌감을 씻어내기 위해 다시 핸드폰의 전원버튼을 누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외로움이 고통이 되어 온몸을 지배할 때가 되는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폭식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마구잡이로 물건을 사기도 한다. 심해지면 자해를 하고 자살 시도를 한다. 사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구토액이 들어있지 않은 독극물을 찾아내어 다량을 먹었지만 실패하였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나의 고통에 져버렸고 스스로를 119에 신고했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고 나서야 스스로의 멍청함을 후회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손목을 긋는 게 가장 이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동맥만 그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동맥은 깊이 있었고 살을 파고들 때마다 신경을 건드려 무자비한 고통이 쏟아졌다. 뛰어내린다는 선택지는 살아날 가능성이 높기에 자행하려 하진 않았다.
그때 한 사진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던 여자의 사진. 그것을 보면서 내 미래의 죽음이 저리도 아름다운 것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었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아름답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으로 끝이 날 삶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갈 본능을 준다. 나의 본능도 나를 살리려 애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선을 넘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이성이 본능을 이기고 나를 죽일 것이다. 동맥을 그어도, 독극물을 마셔도 죽기 못한다면 그때는 뛰어내리는 수 밖에는 없다. 때문에 언젠가 자살의 계획이 틀어진다면 실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외로움과 불안이 나를 찾아드는 날이면 날이 달린 것들을 찾는다. 죽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건이나 물티슈 따위를 준비한다. 피가 남아 있지 않게, 모든 것이 끝나면 지혈을 할 수 있게. 그저 손목을 긋는다. 날이 부드러운 살사이를 날카롭게 파고 들면 일자의 선이 남겨지고, 선에서는 빨간 피가 배어 나온다. 모든 과정은 고통을 동반한다. 나는 동물의 그것처럼 울부짖다가 흐르는 피를 보고서야 눈물을 멈추고 정신의 평안을 찾는다. 그러면 외로움의 쇠공은 나를 데려가지 못한다. 피라는 것은 쇠공이 만든 진공의 상태를 메워버린다. 외로움의 쇠공은 나를 데려가지 못했고 침대 위에 웅크린 나는 지혈을 하면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