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다. 외동아들이라서, 12살부터 해외 유학을 해서, 21살부터 자취를 해서 아무래도 확률적으로, 물리적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환경이었다. 그렇다 보니 방 한편에서든, 어디론가 이동을 하면서 든, 밥을 먹을 때든 홀로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딱히 할 게 없을 땐 주로 책을 읽곤 했다. 어렸을 땐 소설을 좋아했다. 아가사 크리스티,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서 코난 도일 등 세계관이 확장되고 긴장감 넘치는 소설 장르를 비롯해 삼국지, 초한지, 손자병법과 같이 현실을 반영한 중국 역사 소설도 만화가 아닌 글로 읽었다. 그래서 난 유럽사와 중국사를 한국사보다 더 잘 아는 편이다. 심지어 외국에서 살다 보니 고등학생 땐 한국지리보다 유럽과 중국의 지리를 더 잘 알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어렸을 때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설보단 최대한 현실에 기반하여 독자로 하여금 두뇌 풀가동하며 다음을 예측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소설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선 아무래도 입시를 논술로 준비했고 철학을 전공하다 보니 20대에는 온통 철학서만 읽었다.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한 편이라 학교에서도 어지간해선 혼밥을 하며 책을 읽었고 신촌 하숙집에서 자취를 하다 보니 늦은 밤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취미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역대 철학서 독파라고 농담 삼아 말했을 정도였고 실제로 밤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서를 읽었으니 얼마나 알아먹었는지를 떠나서 그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대학 시절 유일하게 가입한 동아리도 인문학 동아리였고 전공도 아닌데 철학 전공자보다 더 철학을 좋아하는 철덕들과 교류하는 게 감격스러웠고 흥분됐다. 심지어 그 어렵다는 연세대 의대를 두 번이나 합격하며 연세대 의대 논술전형을 폐지시킨 주인공도 같은 동아리였는데 그 친구는 4년 만에 의대 본과 진학 후 적성에 안 맞다며 자퇴한 뒤 교육에 뜻을 품고 사대에 입학할 정도로 인문학에 빠진 유명한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법조인이 된 친구들도 제법 많고, 박사 학위를 마치고 임용이 된 친구도 있고, 대기업이나 증권가 등에 취직하여 다들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지만 학부 때 우리는 약간 비정상적으로 철학에 진심이었다. 예를 들어 공대에서 문대로 전과한다거나 의대생이 전공 수업보다 문대 수업을 더 많이 수강신청한다거나 20명도 안 되는 동아리인데도 그 바쁜 총학 회장과 총동연 회장이 속해있어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동아리로 평가받는 참으로 철학을 좋아하는 신비한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우리는 무려 mt에 가서도 반나절을 독서와 발제에 할애하는 진심 철학도들이었다. 당시 한참 현대 프랑스 철학에 빠져있었던 학술부장 덕분에 데리다, 들뢰즈, 푸코 등을 대학원생 수준으로 공부했고 전공 수업에서 딱히 공부하지 않아도 모르는 게 없는 수준으로 뇌새김 당했다. 이만큼 어떤 특정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타고난 기질적인 부분이 후천적인 환경 요인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반증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우리는 500개가 넘는 동아리 중 하필 인문학 동아리를 선택하여 졸업할 때까지 함께 했으며 로스쿨 시험, 5급 공무원 시험, 박사 학위자들도 제법 이른 나이에도 많이 배출했다는 점에서 이 영역에서만큼은 충분히 타고났다는 말을 들을 만한 것 같다. 나는 29살에 학원을 창업하며 최근까지 5년 동안 철학서는 거의 읽지 않았다. 대부분 경제, 경영, 자기 개발서들을 읽었고 이러한 책들도 적성에 잘 맞았는지 상당히 잘 읽혔다. 한편으론 진득하게 앉아서 가르치는 것보단 사업을 확장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인사 경영까지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가로서의 재능보단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더 탁월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학부생이 아닌 대학원생으로써 다시 철학하고자 한다. 아무리 계산해도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엄청나게 손해라서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는데 정말 갑자기 결정이 됐다. 그래서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르고 나면 반드시 끝을 봐야 하는 것일까. 철학계와 한번 맺은 인연은 지연될 순 있어도 절연될 순 없는 것일까. 돈 한 푼 안 벌어다 주는 학문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을 전공한 나는 돈 하나만큼은 제법 번 것 같다. 더불어 잘 생각해 보면 내가 20대 때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런 고민 걱정 없이 온전히 철학하고 싶어서였다. 무지와 가난은 영원히 대물림 된다는 말이 무서웠고 그래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다짐했던 게 기억난다. 잠시 돈 벌로 떠날 테지만 몇 년 안에,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그때까지만 잠시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