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음의 정의

by 박태윤

<다르다>

나는 맞벌이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다. 12살부터 유학 생활을 했고 20살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자취하고 있으므로 34년의 삶 중, 11년만 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그마저도 유치원 때부터 종일반 신세를 졌으니 해가 지고 밤하늘 달빛 가득할 때나 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이처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깨어있는 시간을 기준으로는 정말 짧은 시간만 부모와 함께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혈연보단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을 가족처럼 대하는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관계는 한계가 있으므로 일생 동안 만남과 이별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했다. 덕분에 나는 홀로 있는 게 두렵지 않고 차라리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덜 쓸쓸해서 그런지 모두가 잠든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다. 그래서 가슴 한편에는 외로움이란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있고 어려서부터 홀로 칠흑 같은 고독함에 맞서 묵묵히 싸워나가야만 했다. 한 때 전여친에게 왜 내 곁에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한없이 밝은 것만 같은데 자세히 보면 맑은 눈빛 속에 깊이 드리운 그림자, 어쩌면 이별에 대한 불안, 그래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숨기기 위한 발버둥을 읽었고, 그로 인해 차마 거절의 언어는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제 아무리 화려한 척, 괜찮은 척, 밝은 척해도 부모와 함께했던 시간이 짧은 탓이란 그럴싸한 핑계를 전제로 스스로의 삶을 자평하자면 내가 딛고 서있던 기반은 어두 컴컴한 밤과 같은 공허였는데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 광활한 적막함 가운데 은은히 드리워 비춘 달빛을 등대 삼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전여친은 나와 완전히 상반된 가족관을 지녔다. 나는 친인척을 비롯해 부모와도 거의 연락하지 않는 것에 반해 그녀는 매일 가족과 통화, 문자, 그리고 실제로 만난다. 그녀가 중학생일 때 장인은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 장인은 오른손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가는 고난의 시기마다 똘똘 뭉쳐 서로를 위로하고 역경을 견뎌냈다. 그녀의 가족은 대구에서만 평생을 살며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도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했다. 4대째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주말마다 온 가족이 만나고 명절에는 6촌들까지 모인다. 이처럼 그녀는 아주 안정적인 배경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보니 사람이 선하고 남을 잘 믿는다. 반면 여러 지역과 다양한 나라에서 살았던 나는 13살에 별거한 부모까지 한몫 더해서 관계가 항상 불안정했는데 아내를 만난 후 버프를 받은 덕에 최근의 삶은 따분할 정도로 안정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예전엔 지극히 평범한, 온실 속 화초 같은, 삶을 살아온 아내의 과거에 흥미가 없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했는데 든든한 가족이 주는 안정감으로부터 나오는 짬바 덕분에 나는 공황장애마저 극복할 수 있었다. 학교 교사인 그녀는 포근하고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다. 학교에서도 포용적이고 이러한 그녀의 편안함은 장모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같다>

장모님의 삶은 애순이의 생애와 유사한 점이 많다. 어린 시절 아빠를 일찍 떠나보내야 했고 제법 젊은 시절에 엄마마저 아빠 곁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장모님의 모친 또한 애순이의 엄마처럼 남편 없이 홀로 고군분투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지병에 의해 갑자기 돌아가신 점도 일맥상통하다. 이와 같은 삶을 본받아서 그런지 장모님은 항상 사막처럼 고요하게 낮은 자리에서 바다처럼 드넓은 아량으로 묵묵히 남편을 비롯해 딸과 아들 그리고 사위와 손녀를 보살핀다. 딸을 키워보면 딸과 엄마의 각별한 관계를 두 눈으로 직관하게 된다. 아내는 딸이 마치 자신의 전부인 것 마냥 정성으로 돌본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러한 딸이 가장 당연하게 여기는 존재가 장모님에겐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논리를 확장해 보면 장모님도 한 땐 누군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을 테고 그렇게 다시 돌고 돌아 대물림 되어 이젠 할머니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에선 환생한 애순이의 엄마가 애순이의 생애를 읽고 장하다며 울컥하는데 어디선가 장모님이 일군 가족의 모습을 본다면 그녀의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 상상해 본다. 딸아이를 보면 엄마가 이 세상 전부이던데 결국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 셈이다. 증조할머니에게도 내 딸이, 할머니에게도 내 딸이, 엄마에게도 내 딸이, 딸에게도 먼 훗날의 딸이.


나와 아내는 mbti가 정반대이고 전혀 다른 유년기를 보냈다. 그렇게 무엇하나 닮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서 둘을 반반 빼닮은 딸이 태어났다. 오늘도 아침부터 아빠를 찾는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다. 어느덧 새로운 것을 해내며 커가는 딸의 모습을 알아차릴 때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아쉽다. 이토록 세월이 흐르는 게 서운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더 또렷하게, 명료하게, 절실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이처럼 나에게 내 딸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장인에게도 내가 아내 삼은 여자가 세상 전부일테다. 어쩌면 나는 장인이 평생 한 것에 비하면 특별한 노력 없이 그녀를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에서 왜 양관식이 사위를 그토록 얄미워했는지 알 것 같다.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은 왠 놈에게 내 전부를 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딸을 가장 아까워할 줄 아는 그 남자에게 딸을 허락하는 날이 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그전까지 딸이 건강하고 별 탈 없이 자랄 수 있게 정성을 다해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많은 이들에게 아빠로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겉으론 닮은 게 하나 없을지 모르지만 부모로서의 마음은 똑같다는 점에서 그 마음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역지사지의 계절이다.



작가의 이전글2025 연말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