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by 박태윤

<꿈의 해석>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활동, 버킷리스트 만들기. 나는 꿈스케치란 활동을 하며 3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는 어느 학생이나 적었을 법한 SKY 진학. 머지않아, 연세대에 합격하며 첫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선생님이 되는 것. 사람을 향한 관심이 많던 나는 함께 어울리는 게 좋았고 그중 가장 편하게 만날 수 있는 10대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학원에 취업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교육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두 번째 목표도 이루게 됐다. 세 번째 목표는 멋진 스포츠카를 갖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의 상상이라 다소 엉뚱한데 아마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을 스포츠카로 대변한 것 같다. 특히 과외쌤이 투스카니를 몰고 다녔는데 그게 멋들어져 보였던 영향이 컸을 테다. 아무튼 20대엔 포르테쿱, 벨로스터, 제네시스쿠페를 탔고 현재는 타이칸을 타고 있으니 이로써 중학생 때 꿈꿨던 3가지 목표는 전부 이뤘다.


<테세우스의 배>

사람이 바뀔까? 아니, 사람은 바뀌지 않아. 아니야, 바뀌기도 해. 이 주제에 대해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사람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면 결정론적이라는 점에서 애석하고 서글프다. 반대로 사람이 쉽게 바뀐다면 한편으론 무섭다. 10대 시절에는 사람이 당연히 바뀐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바뀔 수 있고 인생일대의 일이 생기면 마찬가지로 변화하지 않겠는가. 반면 20대에는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니 선천적 기질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좀 바뀐 것처럼 행동할 뿐이지 타고난 성향은 바뀌어봐야 거기서 거기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30대가 된 현재는 사람이 충분히 유의미한 수준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 같다. 물론 근본적 실체는 제법 긴 시간과 노력, 주변 환경이 받쳐줘야만 바뀌는 것 같긴 한데 꼭 본질만 놓고 사람을 평가할 순 없고 무엇이 본질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본질이냐 등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사람은 바뀐다고 생각한다.


최근 1~2년 사이에 내 삶은 격변했다. 유부남이 됐고 더 나아가 아빠가 됐다. 사업을 운영한 연차도 제법 쌓인 덕에 자산을 형성했고 굳이 일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게임에서 레벨이 오를 땐 일정 경험치를 쌓으면 된다. 그리고 그게 수치화되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성장하고 있는 게 보인다. 반면 인생은 경험치를 쌓으면 곧 레벨이 오른다는 게이지가 없다. 즉, 잘 살고 있다에 대한 시각화된 지표가 없다. 그래서 어렵고 지친다. 단적으로 공부가 그렇다. 시험 쳐보기 전까진 알 수가 없다. 단계별로 올라가는 게 아닌 불투명한 수면 아래 어딘가에서 엄청 치열한 인고의 노력 끝에 임계치를 넘어서면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한다. 아기가 말하게 될 때까지, 악기나 운동에서 무언가를 연습하다 어느 순간 될 때까지, 처음 배울 땐 전혀 이해되지 않던 공부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방대한 경험치를 쌓아야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한 사람의 삶도 어느 한순간에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부분들이 모여 끝내 하나의 합을 이룬 결과일터. 그러니 미시적으로 잘 느껴지지 않을 뿐, 거시적 관점에선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나도 서서히 변화했다. 예전엔 변화무쌍하고 휘황찬란한 게 좋았던 반면 지금은 안정적이고 단정한 게 좋다. 라이프 패턴뿐만 아니라 옷도 그렇고 차도 그렇다. 항상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이젠 단색의 옷을 선호한다. 과거엔 딱 맞아떨어지고 정형화된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게 좋았는데 현재는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화를 지향하는 문학적이고 감성적인 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난주 수능이 끝났다. 수능이 끝나면 난이도와 입시 결과를 확인하는 것 외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뉴스를 보며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부모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터벅터벅 시험장에 들어가는 학생의 떨리는 뒷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의 표정. 한 시험이 무사히 치러지기까지 고생하는 수많은 인력들. 시험이 끝나고 부모에게 안기는 학생. 결과와 무관하게 아이를 감싸 안아주는 부모. 이 모든 게 매 수능마다 반복되는데도 처음 보듯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 교시만에 포기하고 수험장을 나와서 정처 없이 떠도는 학생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처음으로 이런 기사에 댓글을 달아봤다. 부모는 아이의 실패를 수 만 번도 더 지켜보며 키운다. 그럴 때마다 대신해주고 싶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아이가 아프거나 힘들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키운다고. 그러니 인생 전체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수능 결과로 인하여 학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테니 돌아가도 괜찮다고. 어차피 읽지도 않을 텐데 댓글 달아서 뭐 하냐는 게 내 과거의 생각이다. 신기하게도 부모가 되니 부모의 마음이 헤아려지고 나이가 먹으며 사람이 서서히 변한다.


<바로미터>

나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나를 위해 유익한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넘어서 우리 가족에게 유익한 것, 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살만한 가치가 있을 법한 곳이 되는 것 등을 이루는 것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성공의 척도가 변했다. 더 이상 나만 잘 살고 나만 돋보이면 되는 것에 흥미가 없어졌다. 스스로 나 자신을 봐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렇게나 터무니없이 변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보니 역지사지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게 된다. 한 때 메이저리그에선 마이크 트라웃을 mvp 바로미터로 불렀다. 트라웃보다 성적이 좋으면 mvp,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면 트라웃이 mvp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며 자연스레 성공의 척도도 변한다. 나의 세월도 흘렀고 나의 세상도 변하여 나의 성공의 척도도 바뀌었다. 모두가 이유도 모른 채 쫓던 게 누군가에게는 무색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나처럼 서서히 바뀐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드디어 탈피한 나는 전혀 다른 것들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처럼 사람이 바뀌니 꿈도 바뀐다. 나의 바로미터, 즉 나의 성공의 척도가 물질적인 것에서 심미적인 것으로 바뀐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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