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대를 면제받았다. 한 때 공황장애가 찾아온 덕분이었다. 국가는 나를 군대에 보내면 안 될 수준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공인해 줬다.
유독 추운 겨울이었다. 뉴욕의 겨울은 서울보다 10도 정도 더 영하로 내려간다. 위도상 평양보다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최저 기온이 더 낮다. 겨울밤은 가뜩이나 깜깜한데 그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쳐 앞을 보기가 힘들어 더욱 어둡게만 느껴졌다. 너무 춥다 보니 온몸에서 생존하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가깝게 다가온 날이었다. 죽음이란 무슨 느낌일까 생각하면 아주 차갑고 칠흑 같이 어두컴컴한 상태일 테다. 그날 나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죽음에 가장 근접했던 것 같고 사실 죽을 뻔했다기보단 죽으려고 했다는 게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안타깝다.
외로움과 고독함을 못 이긴 탓일까, 삶의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해서일까, 아무도 내 곁에 있지 않다고 느껴서일까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주 강렬한 공황 발작을 일으켰던 밤이었고 지금 살아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기억이다. 멀쩡한 20살 남자가 난데없이 밤을 새워 울다 웃다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병적으로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된다. 홀로 기숙사 방 안에서 밤을 지새우며 극심한 절멸 공포를 버텨낸 끝에 어느 순간 닭이 울기 시작했고 이어서 새가 지져귀는 소리, 눈을 저벅저벅 밟는 발자국 소리, 삽으로 눈을 치우는 소리가 나서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비치는 창문을 얼어보니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다음 날 개와 늑대의 시간, 나는 살면서 두 번째로 죽음을 마주했다. 인근 도시에 볼 일이 있어서 다녀오는데 창 밖으로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주 가파른 절벽 길이었는데 좌측엔 큰 바위들과 미국 특유의 갈색 나무들이 있었고 우측엔 악어가 나올 것 같이 잔잔한 물이 흐르는 제법 큰 강이 있었다. 아마 30초 정도였을텐데 핸들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굉장히 편안했던 그 기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는 건 이런 편안한 기분이구나. 아무 일이 없자 서서히 눈을 떴을 땐 운 좋게 핸들이 왼쪽으로 살짝 꺾여 있었고 하필 길이 왼쪽 커브라서 나름대로 차선을 맞춰서 가고 있었다. 반자율주행이 없던 시기인데 명이 다하지 않았으니 더 살라며 신이 살려준 것만 같았다. 연이틀 귀신에 홀린듯한 상태라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정신을 차리고 가까운 휴게소에 주차하고 어쩔 수 없이 그날은 차에서 밤을 보냈다. 나름 뉴욕의 한 겨울에 운치 있게 차 안에서 푸르른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어제 밤을 세운 피로와 긴장에 의해 쓰러지듯 잠에 들었던 날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내가 우주의 먼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시기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빌딩들 앞에 영화에서나 보던 뉴요커들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던 일개 학생이었기 때문에서도 그렇고 엑스트라만도 못한 역할에 불과할 것만 같은 내가 죽어도 별 탈 없이 세상은 돌아가겠구나를 뼈저리게 느껴서이기도 하다. 종종 내가 죽으면 누가 관심이나 갖을까 생각해 보곤 하는데 기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나는 내 생일을 홀로 보낸 날이 제법 된다. 외동아들이라 부모 외엔 나를 챙길 사람이 없는데 아빠와는 연락을 안 하고 지내서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일단 숫적으로 불리하다. 심지어 12살부터 유학해서 그전 친구들과 연락이 끊켰고 해외에서도 1~2년 지내다가 제법 친해지면 다른 곳으로 가야 했으니 성인이 된 후엔 정말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친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생일날 축하한다는 연락이야 왔지만 정작 누구도 따로 만나서 축하해 준 사람이 없던 해가 몇 차례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초등학생이 홀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때 느꼈던 두려움과 외로움은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고 매일 밤 혼자 자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날들도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최대한 생각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우선 문제 해결 후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다. 덕분에 성인이 된 이후론 혼자 있는 게 두렵지 않았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못 갈 길이 없다는 말을 가슴속 깊이 새겨놨는데 실제로 진정한 의미에서 홀로 서기가 가능한 자는 정말 천하무적일 테다. 그 누구에게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혼자 최대 어디까지 해봤냐고 묻는다면 나는 혼자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아무렇지 않게 구워 먹었고 야구장이나 영화관을 100번 이상 혼자 가봤다. 미국은 추수감사절 휴일이 2주 정도 되는데 2주 동안 누군가 만날 일이 없으니 소리 내서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평생 혼밥한 끼니가 누군가와 함께 먹은 끼니보다 많은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혼자 외로운 게 나쁘기만 한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버텨내기만 한다면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갈 수도 있다. 혼자 있어서 좋은 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이 그렇다 보니 책도 더 읽을 수 있고 공부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딱히 남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으니 사치스러울 일이 없고 타인에 의해 시간을 버릴 일도 없으니 오직 내가 발전하는데만 전념할 수 있다. 그래서 24살에 학원 창업을 혼자 하는 것도 가능했고 홀로 타지에서 지내는 것도 내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사업을 하며 납득하기 힘든 경우도 이겨내야 하거나 정든 학생이 더 이상 안 오게 됐다는 연락을 받은 후 쓸쓸히 방 안에 앉아 있어야만 했던 날도 자주 있긴 하다. 그래서 밤만 되면 온 동네에 끙끙대며 홀로 현수막을 걸고 전단지를 붙이며 홍보하던 것도 혼자 있을 수 있기에 가능했다고 확신한다. 박진영 씨가 모교에서 강의할 때 간 적이 있는데 실력을 갖추면 그 사람 주변으로 사람이 모이니 젊을 때 외롭다고 사람 찾아다니지 말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분명 그러한 부분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오히려 혼자 일하는 게 더 편하다. 그래서 학원보다 주식 투자와 글 쓰는 게 적성에 더 맞는 것 같다. 유럽에 1달 있을 때도 느꼈듯이 학원 일은 여전히 사람을 상대해야 하고 물리적인 제약이 따르지만 주식이나 글쓰기는 언제 어디서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이 분야를 학원 사업하는 것만큼만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게 되면 훨씬 자유로워지겠구나 싶었다. 이러한 일 또한 혼자 있는 게 익숙한 사람이 잘할터.
결론적으로 훗날 아이에게 알려준다면 외로움은 극복하는 것이라기보단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왠지 몰라도 외로움이란 감정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하는 게 오히려 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공황장애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혹은 또 그러나보다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순간 괜찮아졌다. 그냥 이 감정이 올라오는구나 하면서 넘기다 보니 지금은 잘 알아차려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다시 찾아와도 꽤 반갑게 맞아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매번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도 외로움의 정점에 서 있던 덕분에 되려 얻게 된 것들이 훨씬 많고 그래서 오히려 고마운 존재가 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