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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화 Mar 20. 2023

동생아, 아니, 선생님,
제 글을 다듬어 주세요!

[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10

 그림책 작업의 인연은 그림작가, 디자이너님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정가, 인쇄소 담당자, 독자 등등 앞으로 몇 번에 걸쳐 계속해서 새로운 인연들이 이어지고 이어질 것이다. 보통의 상상력이라면 예측하지 못할 인연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생겨날 것이다. 이 전과정을 기록하는 과정이 삶 자체의 동화적인 특성을 여실히 드러내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지를 쓴다. 그림책 출판 일지가 비단 '출판' 일지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복선을 섬세하게 마련해두며, 또하나의 귀한 인연을 풀어보고자 한다. 그림작가와 디자이너님이 그림책 작업을 바탕으로 새롭게 시작된 인연이라면, 교정가는 과거의 인연이 작업의 인연으로 새로이 전환된 케이스이다. 이 사례를 통해서도 나는 역시나 인연의 오묘함을 본다. (그 옛적부터 인연법을 설파하신 부처님의 지혜도 본다.)




 인문광역생 15학번으로 입학한 나는 아직 전공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인문광역'은 쉽게 말해 '인문대학의 자유전공학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단 인문대학에 소속되긴 하지만, 전공 탐색 기간을 거친 후 인문학부 내의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해당 전공에 진입하는 기준이야 있지만, 까다롭지는 않다. 인문광역생은 전공 탐색의 도움을 받을 겸, 다양한 전공생들과 친분을 쌓을 겸, 각 전공들의 반에 임의로 배정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인문광역생이지만, 독어독문학과 전공생들로 구성된 반에 소속되었다. 그 반은 약 10명의 독어독문학과 전공자들과 약 5명의 인문광역생으로 구성이 된다. 이 중 내가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 동기는 딱 한 명이다. 그정도로 인연에 깐깐한, 어쩌면 느낌이 오지 않으면 별 노력을 들이지 않는 내가 계속해서 연락하고 지내는 후배도 딱 한 명이었다.




 이 후배는 거미줄처럼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나 역시 성격이 드세면서도 예민한 편인데, 예민함의 촉각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에너지나 영감 따위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면, 후배의 경우 '다른 사람들'이 느낄 만한 감정, 생각 등에도 고루 초점을 맞췄다. 다시 말해 나의 예민함의 레이더는 '나의 작업' 이후에야 '관계'로 향한다면, 이 후배의 레이더는 '관계'와 '자신의 작업'에 거의 동등한  비율로 맞춰져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비슷한 예민함을 가지고도 훨씬 더 '감정'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배, 아니, 동생은 처음 만나던 당시부터, 즉 16학번이던 그 아이가 우리반에 들어온 16년도부터 '번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 개중에도 가장 정확하고 어여쁜 한국어를 선별해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동생은 영문과와 국문과를 복수전공하였고, 교정 외주 작업도 꾸준히 맡아서 했다. 

 



 당시의 나는,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동생이라는 이유로 다 예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후배 특유의 섬세한 기질이 나와 부합하는 면이 있었고, 다정다감한 동생의 애정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강했으므로, 우리 사이의 관계는 끊길 듯 말듯 무난히 이어져왔다. 그마저도 대개 동생이 먼저 연락을 하는 편이었지만, 나 역시 연락에 거의 언제나 긍정적으로 화답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관심 분야가 아니면 한 치의 관심도 주지 않는 냉정한 버릇이 있는지라, 그 아이의 발전을 응원하고 기쁨을 나누긴 하였으나, 그 아이의 작업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럴 만한 계기도 없었다.




 그런데 인생사 참 모르는 일이지 않나. 내가 그림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결국 1인 출판사를 개설하기로 마음 먹어, 디자이너든, 교정가든 인력 하나하나를 전부 발품 팔아 구해야 되는 상황에 처하자, 그간 별 관심을 쏟지 않았던 동생의 전문성과 열정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교정은 참으로 섬세한 작업이다. 문법의 정확성, 작가의 의도, 어투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여 작품을 크게 변형하지 않는 선에서, 그럼에도 변형하여 더 나아질 부분들은 꼼꼼히 캐내어 착실히 개선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작가의 입장, 독자의 입장 등을 두루 고려하면서 진행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아이 특유의 섬세한 성격은 이 일에 완벽히 부합한 셈이었다.




 내가 그림책 작업을 하며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던 몇 년의 시간 동안 동생 역시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꾸준히 외주를 받으며 전문성을 향상시킨 상태였다. 그 아이의 섬세함과 전문성, 다수의 외주 경험, 그리고 성실함 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이토록 오래, 별 다른 기대 없이 이어진 인연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므로, 나는 아무 고민 없이 동생에게 교정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교정이 완료된 파일을 받았을 때, 나는 짐작만 하던 그 아이의 섬세함을 매우 정교하고 정제된 형태로 똑똑히 마주할 수 있었다. 천직이었다! 







한 사람의 성격과 재능이 
정확히 교차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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